언론홍보

언론홍보 게시판입니다.

제목 "남산이 이런 곳인 줄 몰랐네"-프레시안 2016.3.18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6-03-18

"남산이 이런 곳인 줄 몰랐네"

[작은책] 남산, 고구마 줄기처럼 역사가 줄줄

 박준성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프레시안 2016.3.18

 

"와, 남산도 좋은데, 돈도 안 들고…."  

남산 팔각정에서 어떤 중년 부부가 나누는 이야기였다. 서울 남산만큼 귀에 익숙한 산도 많지 않을 것이다. 평생 한 번도 가 본 적 없으면서도 "내가 언제 갔었지? 아마…"하며 스스로 착각하기도 하는 산이다.

내가 처음으로 남산에 올라간 것은 1968년 초등학교 5학년 수학여행 때였다. 1962년부터 다니기 시작한 케이블카를 타고 올랐다. 그때만 해도 시골 학생들이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면 남산은 케이블카를 타고 꼭 올라가 봐야 할 곳으로 꼽던 시절이었다. 근래에는 남산에 세워진 동상을 보거나 숲 해설 공부를 하면서 몇 번 가 보았다. 지난해 11월에 남산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둘레길이 이어지고 나서야, 남산을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역사 기행을 준비할 때 핵심은 가 봐야 할 곳 동선을 잡아 일정을 짜는 일이다. 남산을 어떻게 돌아보는 것이 좋을까. 둘레길만 돌다 보면 역사가 빠지고, 역사 유적만 찾다 보면 한 번에 남산을 돌아보기 쉽지 않다. 몇 번 답사를 하면서 숭례문에서 시작해 "남산공원-안중근의사기념관-남산도서관 옆 소월시비-남산야외식물원-남산성곽길-N서울타워-팔각정-봉수대-서울교육연구정보원-와룡묘-남산북쪽순환도로-석호정-국립극장-장충단공원"으로 이어지는 태극문양 동선을 개발(?)했다. 이 길을 따라 다시 한 번 걸었다. 하루 일정의 등산 겸 역사 기행으로 제법 괜찮다. 이번에는 그 길 가운데, "안중근의사기념관"까지 소개할 예정이다. 
 

▲ 백범광장에서 본 남산. ⓒ박준성

 

남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수없이 많다. 서울 성곽의 핵심인 숭례문에서 출발해 "소월길"과 "소파길"이 만나는 남산공원 입구에서 남산 역사기행을 시작하자. 소월길과 소파길이라는 이름은 1984년 11월 서울 시내 249개 가로 이름을 지을 때 붙인 이름이다. 소월길은 1968년에 한국일보사가 지금의 남산도서관 옆에 "소월시비"를 세운 데서 따왔다. 소파길은 소파 방정환이 남산과 특별한 연고는 없지만 남산에 세운 그의 동상에서 유래한다. 남산공원 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왼쪽으로 김유신 동상 안내판이 보인다. 복원한 성곽을 따라 오르다 보면, 김유신 동상을 놓치고 지나치기 쉽다. 지난 2월 초에 갔을 때 김유신 동상은 복원 수리 중인지 두꺼운 비닐 천막을 통째로 뒤집어씌워 놓아 볼 수 없었다. 남산도서관 옆에 있는 이황, 정약용 동상, 장충단공원에 있는 이준 열사 동상도 마찬가지로 천막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남산에 세워진 동상 가운데 사명당(1968, 송영수), 김유신(1969, 김경승), 유관순(1970, 김세중), 정약용(1970, 윤영자), 이황(1970, 문정화) 동상은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만들었다. 1966년 <서울신문>이 앞장서서 애국선열들의 조상건립운동을 시작했고,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총재를 맡았다. 김유신 동상과 유관순 동상은 처음에는 서울시청 앞과 남대문 가까이 세웠는데 지하철을 만들면서 남산으로 옮겼다.

조각가 김경승(1915~1992)은 이때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전문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김유신 동상뿐 아니라 세종대왕과 정몽주 동상도 만들었다. 김경승은 일제 강점기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네 번 특선을 하고 추천작가를 지냈으며, 대표적인 친일 미술가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했다. 해방 후 친일 부역 미술가로 찍혔으나, 1950년대 이순신·맥아더 장군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많은 동상을 만들었으며 1961년에는 수유리 "학생혁명기념탑"과 수호상까지 만들었다. 1964년에는 3·1문화상을 수상했고, 1987년 정읍 황토현에 세운 전봉준 장군 동상도 그가 만들었다.
 

김유신 동상을 보고 위쪽으로 올라가면 넓은 "백범광장"이 자리해 있고, 1986년 4월에 세운 이시영 동상과 1969년에 세운 김구 동상을 볼 수 있다. 나라를 빼앗긴 뒤 이시영의 6형제는 재산을 모두 처분해 50여 가족이 만주로 떠나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이시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과 재무총장을 지냈다. 6형제 가운데 이시영만 살아 돌아와 1948년 제헌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으로 뽑혔지만, 이승만의 독재와 부정에 맞서 스스로 부통령 자리를 내놓고 반독재투쟁을 벌였다. 높은 좌대 위에 오른손을 높이 치켜든 김구 동상은 김경승과 민복진이 같이 조각했다. 고대의 제왕이나 영웅,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지휘봉을 치켜든 모습같이 19세기 유럽의 군국주의 시대에 시작한 동상의 전형을 그대로 따랐다. 황토현·전봉준 동상 형상도 아주 비슷하다.  

 


▲ 남산공원 백범광장 오르는 길. ⓒ박준성

 


▲ 백범광장 김구 동상. ⓒ박준성

 

백범광장을 지나 왼쪽에 있는 "서울교육연구정보원"은 원래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육영수 여사가 1970년 7월에 세운 어린이회관 건물이었다. 다음 해인 1971년 7월 어린이회관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그 옆에 평생 어린이 문학과 어린이 운동을 해 온 소파 동상을 세웠다. "남산어린이회관"은 1974년에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겼으며, 소파 동상은 1987년 5월에 옮겼다. 남산어린이회관이 옮겨 간 뒤, 건물을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쓰다가 1988년 도서관이 서초동으로 옮기고 나서 지금의 서울교육연구정보원이 되었다.

안중근 동상에서 "N서울타워"쪽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남산식물원이 있던 자리는 공터는 샛길만 남겨 놓고 공사 중이었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에 세운 조선신궁 본전이 있던 자리이다. 서울교육연구원 자리에는 조선신궁 참배 순서를 기다리던 참집소가 있었고, 안중근의사기념관에는 사무소가 있었다. 조선신궁은 해방 뒤 일본인들이 스스로 해체하고 떠났다. 1956년에는 조선신궁 본전 자리에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4월혁명" 후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는 1968년에 남산식물원이 들어섰다. 남산식물원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파월장병이 싸우던 열대지방을 떠올릴 수 있도록 열대식물을 주종으로 삼았다고 한다.

안중근 동상에서 "N서울타워" 쪽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남산식물원이 있던 자리는 공터는 샛길만 남겨 놓고 공사 중이었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에 세운 조선신궁 본전이 있던 자리이다. 서울교육연구원 자리에는 조선신궁 참배 순서를 기다리던 참집소가 있었고, 안중근의사기념관에는 사무소가 있었다. 조선신궁은 해방 뒤 일본인들이 스스로 해체하고 떠났다. 1956년에는 조선신궁 본전 자리에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4월혁명"후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는 1968년에 남산식물원이 들어섰다. 남산식물원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파월장병이 싸우던 열대지방을 떠올릴 수 있도록 열대식물을 주종으로 삼았다고 한다.

 

 

▲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있는 안중근 의사 좌상. ⓒ박준성

 


▲ 안중근의사기념관. ⓒ박준성

 

나는 한동안 남산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도 김경승이 세운 줄 알았다. 역사 기행 안내도 그렇게 했고, 글도 그렇게 썼다. 다시 보니 김경승이 아니라, 윤효중이 만든 것이었다. 4월혁명 후 시민들이 무너뜨려 끌고 다닌 이승만 동상은 남산에 있던 것이 아니라, 문정화가 만들어 탑골공원에 세운 또 다른 동상이었다. 윤효중(1917~1967)도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나왔고 선전에 특선을 하였으며, 조선미술가협회에서 활동을 하고 해방 후 친일 미술 부역 행위자로 분류됐다. 김경승의 후배로서 행적도 비슷했으나, 이승만 정권기에는 "미술계의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오히려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승만 동상을 만들기 전 해인 1955년에는 남한산성에 이승만 팔순 기념 송수탑을 만들기도 했다. 남산에 얽혀 있는 역사를 뒤적여 보면, 고구마 달린 줄기처럼 줄줄이 연결되어 있다. 파헤치다 보면 보이지 않던 지층에 켜켜이 다른 역사의 흔적이 담겨 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4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