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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토요기획]‘金九 비밀탈출로’엔 피맺힌 독립염원 들리는 듯- 동아일보 2016.2.6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6-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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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金九 비밀탈출로’엔 피맺힌 독립염원 들리는 듯

배석준 기자

입력 2016-02-06 03:00:00 수정 2016-02-06 03:19:02

  


백범 탄생 140주년… 임시정부 유적을 가다 

백범 탄생 140주년을 맞아 대학생 등 32명으로 구성된 백범유적탐방단이 지난달 4일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앞에 모였다. 
상하이=배석준 기자 eulius@donga.com

“중국에서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아버지가 내 이름을 지을 때 광복의 의미를 담아서 빛날 ‘휘(輝)’를 넣었다.

조국 독립에 있어서 임시정부 광복군에 대한 기대가 컸다.”

독립운동가의 아들 유전휘(柳展輝·74) 전 후난(湖南)대 건축학과 교수는 지난달 8일 중국 후난 성 창사(長沙) 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백범유적탐방단을 향해 이같이 말했다. 유 전 교수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고 이후 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고 유자명(柳子明) 선생의 아들이다. 

그는 탐방단이 온다는 소식에 직접 안내자로 나섰다. 유 전 교수는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 선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는 “당시 백범과 아버지가 다방면으로 교류했고 여러 개로 나뉜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아버지는 백범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역사책에 등장하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본 탐방단원들은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들은 “독립운동에 헌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유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유 전 교수에게 대신 전했다.  

서민들이 사는 주택가의 구불구불한 길 끝자락인 창사 시 카이푸(開福) 구 난무팅(楠木廳) 6호.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제에 쫓겨 다니던 ‘임정 이동 시기’에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虹口) 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32년부터 8년간 고난에 가득 찬 피신길에 오른다.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탐방단장)는 “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32년까지 상하이(上海) 시기와 1940년까지 이동 시기 그리고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의 충칭(重慶) 시기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며 “현재 대한민국의 뿌리는 임시정부에서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독립운동가 고 유자명 선생의 아들인 유전휘 전 후난대 교수(가운데)가 지난달 8일

중국 후난 성 창사 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임시정부와 백범의 관계 등을 탐방단에 설명하고 있다.

 

1919∼1932년 상하이 임시정부

음수사원(飮水思源). 물을 마실 때 그 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하라는 뜻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좌우명이다. 광복 71주년이자 백범 김구 탄생 140주년을 맞은 올해 대한민국의 뿌리를 찾기 위해 지난달 4일 대학생 등 32명이 참여한 백범유적탐방단이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 모였다. 탐방단은 백범김구기념사업회(의장 김형오)와 백범김구기념관이 주최하는 백범일지 독서감상문 쓰기 대회에서 최고상인 백범상을 탄 대학생 22명과 박걸순 교수, 조진섭 부산 장안제일고 교사 등 총 32명으로 이뤄졌다.

탐방단은 이날 저녁 인천국제공항에서 1시간 30분가량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에 도착했다. 마침 짙은 미세먼지가 상하이의 화려한 야경을 가리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 이후 그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만들어졌다.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임시정부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임시정부 27년의 역사 중 절반을 상하이에서 보냈다. 백범도 이곳에서 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백범일지에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누구나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들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라며 책을 남긴 이유를 밝혔다. 

이튿날인 5일 찾은 상하이임시정부 청사는 고층 빌딩이 즐비한 신톈디(新天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소는 마당(馬當) 로 306롱 4호로 명품 쇼핑센터와 고급 식당 등이 밀집한 곳이다. 신톈디에 있는 아파트 가격은 99m² 기준으로 20억 원에서 40억 원에 달한다. 1926년 7월부터 사용한 임시정부 청사는 당시 사용하던 모습 그대로 재현해 지금까지 오고 있다. 1층에는 부엌 화장실이 있고 2층에는 임시정부 집무실과 백범의 집무실이, 3층에는 임시정부 요원 숙소 등이 있는 작은 건물이다. 청사는 아침 일찍부터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탐방단원인 임나현 연세대 중어중문학과 학생은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임시정부 청사에 와 보니 조국의 과거와 현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44세의 백범은 1919년 4월 13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는 임시정부를 찾아가 내무총장 도산 안창호에게 문지기를 시켜 달라고 간청했다. 백범은 문지기가 아니라 경무국장으로 임명됐다. 이로써 백범과 임시정부의 독립투쟁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20년대에 들어가면서 백범은 의혈 투쟁을 하기로 하고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일제가 전쟁 승리를 자축하고 일왕 생일을 축하하는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중국 점령군 시라카와 대장 등 일제 수뇌부를 죽였다.

윤 의사가 폭탄을 던진 훙커우 공원에는 그의 호를 딴 ‘매헌’이란 이름의 전시관이 조성되어 있었다. 미세먼지로 가득 찬 중국 하늘은 윤 의사가 폭탄을 던진 그날을 찍은 흑백사진처럼 어두웠다. 전시관에는 윤 의사와 백범이 서로 시계를 교환한 일화가 소개돼 있다. ‘윤 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제 시계는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라며 내 시계와 바꾸자고 하였다. 나는 목멘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이를 보던 탐방단원들의 눈엔 눈물이 고였다. 조현주 중앙대 광고홍보학과 학생은 “역사교과서에서 도시락 폭탄 하나 배웠는데 윤 의사가 가족에게 편지를 남기고 의거를 했을 그 심정이 무척이나 아프고 존경스럽다”고 했다. 

 

 

 

1932∼1940년 대장정 

윤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자 일제는 상하이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을 무차별 체포했다. 백범은 중국 각 신문사에 의거의 진상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일제는 당시 60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백범김구기념관 관계자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200억 원이 넘는 액수”라고 설명했다. 1932년 임시정부는 결국 상하이를 떠나게 됐다. 1932∼1940년 임시정부 이동 시기는 가장 어려운 때로 꼽힌다. 머물 곳을 마련하기도 어려웠고 임정 요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생활했다. 박 교수는 “이 시기 임시정부 청사나 임정 요원들의 거주지 등을 아직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탐방 3일 차인 지난달 6일 탐방단은 상하이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가량 이동해 백범이 피란 갔던 저장(浙江) 성 자싱(嘉興)으로 갔다. 지난해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암살’에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조각배를 타고 수상가옥 사이를 지나 백범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현지 가이드가 바로 그 영화 속 장면을 촬영한 곳이라고 소개했다. 자싱 메이완(梅灣) 가 76호의 백범 피란처는 침실 등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백범은 일본군이 갑자기 들이닥칠 것에 대비해 2층 방 한쪽 구석에 호수로 바로 통하는 비밀 탈출구를 마련해 뒀다. 호숫가에는 타고 도주할 수 있도록 작은 배를 뒀다.

탐방단이 찾아간 그곳은 고요했고 낚시꾼 한 명이 홀로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 시절 백범은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朱愛寶)와 동거하며 일제의 감시망을 피했다. 백범은 “주아이바오를 고향으로 돌려보낼 때 여비를 100원밖에 주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된다”고 백범일지에 적었다. 중국의 유명 여류작가인 샤녠성(夏輦生)은 ‘선월(船月)’이라는 제목으로 57세의 백범과 20세 중국 처녀 뱃사공의 사랑을 그린 소설을 출판하기도 했다.

탐방단은 7일 항저우(杭州) 임시정부로 이동했다. 백범이 자싱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할 당시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이동해 1935년 11월까지 머물렀다. 5일 차인 8일 중국 고속철도를 타고 창사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유 전 교수와 함께 임시정부 청사를 둘러봤다

 

 

1940∼1945년 임정 충칭 시대 

8일 오후 탐방단은 중국 국내선을 타고 충칭(重慶)으로 갔다. 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치는 고난의 대장정을 지나 1940년 임시정부는 충칭에 터를 잡았다. 1945년 독립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정부는 충칭에 머물게 된다. 당시 충칭은 안개가 많은 도시여서 일제의 공습을 잘 막을 수 있었다. 탐방 막바지인 6일 차까지 중국에서 맑은 하늘을 보지 못했다. 급격한 산업화로 미세먼지 등 스모그가 내륙 지역에까지 가득했다. 과거 촉나라의 땅이던 충칭엔 ‘촉견폐일(蜀犬吠日)’이란 고사성어가 내려온다. 촉나라의 개는 하늘에 해가 뜬 것을 보면 이상하여 짓는다는 의미이다.

충칭 시 위중(투中) 구 롄화츠(蓮花池) 38호에 위치한 임시정부 청사 정문에는 70여 년 전 모습 그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글자가 오롯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10여 명의 직원이 전시 안내, 교육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장을 맡고 있는 무위안이(牟元義) 씨는 탐방단에 “충칭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도시이고 임시정부 청사에는 연간 2만여 명이 방문한다”며 “현재 한국의 근원이 된 장소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중국 내륙 깊숙이 위치해 있는 충칭 중심가에서 한국인을 만나는 것은 상하이 등과 비교해 쉽지 않다. 하지만 이곳 임시정부 청사는 충칭에 온 한국인이 모두 모이는 곳이라 할 정도로 한국인으로 가득했다. 가장 인기 있는 사진 촬영 장소는 임시정부 건물의 중앙에 있는 돌계단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11월 3일 이곳에서 태극기를 들고 기념 촬영을 했다. 관람객들은 줄을 서서 사진을 찍었다.   

 

충칭에서 조국의 광복 소식을 들은 임시정부 요인들은 광복의 환희와 아쉬움이 교차했다고 한다. 당시 백범은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라고 백범일지에 기록했다. 독립 과정에서 우리가 주체적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해 장차 한국이 국제 관계에 따라 휘둘릴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을 앞두고 촬영한 마지막 사진에서 조국 광복의 기쁨만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탐방단은 7일간의 일정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 지난달 10일 서울로 돌아왔다. 

백범김구기념관은 신년 특별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성과-카이로 회담-’을 28일까지 백범김구기념관 전시실 2층에서 열고 있다.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 영국 중국의 합의로 ‘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 독립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라고 명시된 카이로선언이 발표됐다. 이러한 독립의 약속이 단순히 외국이 시혜적으로 준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 외교 활동의 성과였다는 점을 집중 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상하이·충칭=배석준 기자 eulius@donga.com

 

 

http://news.donga.com/3/all/20160206/763450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