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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문학이 머래?] 알면 폼나는 명언 -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 소년한국일보 2
작성자 admin 작성일 2022-07-19

 

 

“안 됩니다, 선생님! 이렇게 가시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김구의 거처로 찾아온 청년들의 목소리는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선생님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제발 북으로 가지 마십시오, 선생님!”
평생 동안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해 온 김구가 남북의 분단을 막기 위해 북쪽의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러 북으로 가겠다고 하자, 그를 따르는 청년들이 이를 말리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청년들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놓고 남과 북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구 혼자서 북으로 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걱정했다. 그러나 김구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 소원은 오직 3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을 만들기 위하여 함께 나아가는 것일세.”
일본의 강제 통치에서 막 해방된 조국이 이번에는 남과 북으로 갈라지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대로 두 눈을 벌겋게 뜬 채 조국의 분단을 지켜보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는 않겠다.’
김구는 그렇게 다짐했고, 1948년 2월 10일에 발표한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논설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선언했다.
36년에 걸친 일본의 혹독한 강제 점령에서 간신히 해방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지금의 러시아)의 이해관계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좌우되려 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독일과 일본에 승리한 미국과 소련은 2차 대전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한 모스크바 3상 회의 내용에 따라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반도를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주둔한 채 일정 기간 신탁 통치를 하려 했다. 우리 민족의 힘으로 해방된 새 나라를 세우려던 꿈은 시작부터 불길한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47년 11월 당시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국제연합(유엔)에서는 자신들의 감시 아래 남북 총선거를 치르고 한반도에 새 정부를 세우자고 했다. 이에 이승만을 비롯하여 미군정을 지지했던 남쪽 정치가들은 찬성했지만, 북쪽에서는 미국이 소련과 어떤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이므로 따를 수 없다고 맞섰다. 그러자 이승만과 그를 따르는 정치가들은 남쪽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대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운다면, 북한도 단독정부를 세우게 되리라. 그렇게 되면 우리 민족은 남과 북으로 나뉜 채 민족의 운명이 강대국의 손에 맡겨질 터였다.
‘하나의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한 마지막 방법은 북쪽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뿐이다!’
김구는 북쪽의 지도자 김일성에게 서한을 보내 회담을 제의했다. 이에 북쪽은 4월 초에 평양에서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를 열자는 답신을 보내왔다.
이승만, 김성수 등 미국을 등에 업은 정치가들은 김구를 비난했다. 당시 남쪽을 통치하던 미군정은 김구의 행동이 무모하기 짝이 없으며, 남북 지도자 회의란 조선의 총선거를 방해하려는 공산당의 간사한 계략일 뿐이라고 몰아붙였다. 미군정의 편에 섰던 이승만 등의 정치가들은 어떻게든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막아 보기 위해 김구를 공산당의 계략에 말려든 사람으로 낙인찍고 자신들의 정치적 힘을 불리는 데만 온 힘을 쏟았다. 남쪽 곳곳에서 김구가 북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김구가 어떤 사람이던가?
“평양에 가지 않아도 좋을 만한 대책이 있는가? 백 마리 소를 모아서 나를 끌어내려고 해도 소용없다.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 몰라도, 나는 이북의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 보아야겠다.”
결국 그 누구도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어떻게든 분열을 막아야겠다는 김구를 막을 수 없었다.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비서 선우진과 아들 신을 데리고 시위대의 눈길을 피해 경교장 뒷문을 빠져나갔다. 날이 저물 무렵, 붉은 노을 아래 철조망이 드리워진 38선에 이르렀다. 남과 북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 3년째였다. 조국의 허리를 동강 낸 38선 앞에서 김구는 비통한 마음으로 조국의 산천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소련군 초소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김일성이 보낸 승용차를 타고 북으로 달려갔다. 통일된 조국,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독립투사라는 훈장도,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다는 영예도 버리고 또다시 격랑의 역사에 몸을 던진 것이다. 일찍이 친미니 친소니 하며 혼란과 분열에 빠진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그는 말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나의 소원>, <<백범일지>>

내 소원은 대한 독립. 그 절실한 역사적 소명 의식에 따라 김구는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하여 평생을 바쳤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독립의 꿈을 잃지 않았다. 3ㆍ1운동이 일어난 뒤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위원으로 뽑혔으나 스스로 임시정부를 지키는 ‘문지기’가 되겠다며 경무국장이 되었고, 독립의 희망을 살리고 세계에 우리의 독립 의지를 알리기 위해 이봉창ㆍ윤봉길 등 젊은 투사들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한인 애국단’을 만들어 일제에 맞서 싸웠다.


1940년에는 광복군을 창설하고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일본에 선전포고(1941년)를 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칠십 평생을 나라 잃은 백성으로 살면서 겨레의 아픔과 함께했던 그는 고난
속에서도 조국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고, 후손들에게 온전히 해방된 조국을 물려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싸웠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김구는 우리나라가 또다시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의 통치를 받는 것에 반대했다. 정치적 입장에 상관없이 하나로 뭉쳐 스스로 통일된 정부를 세우길 바랐다. 이 때문에 북쪽 정치 지도자들과의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 군대를 철수시켜야 하고, 남한이나 북한 어느 한쪽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반대한다는 점을 북쪽과 합의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남북회담의 결과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1948년 5월 10일 예정대로 남쪽만의 총선거가 치러졌고, 이에 반대하던 수많은 민간인이 집단학살을 당했다. 결국 7월 17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남한 단독정부가 세워지면서 김구가 그토록 바라던 완전한 자주독립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끝내 암살 당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며 국토를 초토화시킨 한국전쟁을 거쳐 오늘날 세계에서 마지막 분단국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자료 제공=‘인문학이 뭐래? 3- 알면 폼 나는 명언’(햇살과나무꾼 글 지음ㆍ오승민 그림ㆍ한울림어린이)


출처 : 소년한국일보(http://www.kidshankook.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