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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임정에서 NPO의 뿌리 찾았다” 국내 비영리 활동가들의 중국 탐방기 - 조선일보 공익섹션 더나은미래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9-11-06

장지훈 기자 Posted On 2019114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국내 비영리 활동가들이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에 나섰다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임시정부를 우리나라 최초의 비영리단체(NPO)로 보고, 그들의 활동을 되짚는 과정 속에서 NPO의 나아갈 방향을 함께 모색하자는 취지다.

비영리 중간지원조직 공익경영센터는 지난달 15일부터 45일 일정으로 비영리 활동가들과 중국 상해(上海자싱(嘉?항저우(杭州난징(南京) 등 임시정부의 주요 거점을 탐방하는 ‘임시정부를 통해 배우는 비영리의 미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서울혁신센터, 생명을나누는사람들, 선교한국, 성서유니온, 부산사회적경제포럼, 부산대천마을공동체, 한빛누리재단, 밀알두레교육공동체 등 단체에서 20여명이 참여했다.

 

 

 

공익경영센터가 주관한 중국 역사탐방 프로그램 ‘임시정부를 통해 발견하는 비영리의 미래’에 참여한 비영리 활동가들.

중국 상하이 루쉰공원 안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 매정 앞에서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공익경영센터

 

 

임시정부 돌아보며 비영리 정신 되새겨

 

탐방의 첫발은 상해에서 내디뎠다. 상해는 임시정부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곳이다. 김철, 여운형, 조소앙, 이회영 등 29명의 독립운동가는 3·1운동에서 독립선언이 나오고서 한 달여 만인 1919411일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임시정부는 1932년 항저우로 피난할 때까지 14년간 상해에서 항일 투쟁을 주도했는데,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고 재정난까지 겹치면서 다섯 번이나 청사를 옮겨야 했다. 현재는 루완취 마땅루 푸칭리의 청사가 유일하게 남아 있다. 1926년부터 6년간 사용된 상해 시절 마지막 청사로, 상해 최대 번화가인 신천지의 변두리에 외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라는 현판이 나붙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낡고 작은 임시정부 청사와 요원·가족 숙소로 쓰인 영경방 터를 마주한 탐방단은 저마다 탄식했다. 부산사회적경제포럼 소속 황혜란(51)씨는 “세월이 내린 임시정부 청사를 보니 마음이 먹먹하다”며 “먼 타국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배 활동가들의 정신을 새삼 기리게 된다”고 말했다.

 

 

 

상해 시절 임시정부는 일제와 맞서는 동시에 가난과 사투를 벌였다. 김구의 모친 곽낙원 여사는 시장에서 주워온 배춧잎으로 국을 끓여 요원들을 먹였고, 아내 최준례 여사는 둘째 신을 낳고 사고와 병마로 신음하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숨졌다. 의열단원 나석주는 입던 옷을 팔아 김구의 생일상을 차렸다고 한다. 영경방에서 먹고 자며 독립운동했던 나석주는 1926년 귀국해 식민지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인물로, 거사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상해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잠은 청사에서 자고, 밥은 직업을 가진 동포들의 집을 전전하며 먹고 지내니, 거지도 상거지였다.’

 

 

중국 상해 루완취 마땅루 푸칭리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입구. 임시정부는 1932년 항저우로 피신할

때까지 13년간 상해를 거점으로 항일 투쟁했다. ⓒ장지훈 기자

 


이상윤(66) 생명을나누는사람들 정책본부장은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쉬지도 못하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임시정부가 항일 투쟁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대의 앞에 헌신한 요원들의 희생 덕분”이라며 “비영리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곱씹게 됐다”고 했다.

 

상해 일정은 루쉰공원을 둘러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중국 대문호 루쉰의 이름을 딴 이 공원은 원래 홍커우공원으로 불렸다. 1932429, 당시 스물넷 청년이었던 윤봉길이 상해사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모인 일제 군부와 정관계 수뇌부에 폭탄을 던져 7명을 처단한 장소다.

 

탐방단과 동행한 조흔정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상해지부 사무총장은 “윤봉길은 독서를 즐기고, 학예회 연극을 연출하고, 아이들의 운동회를 이끌던 감수성이 풍부한 청년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 청년이 거사를 앞두고는 어린 두 자녀에게 ‘너희도 피가 흐르고 뼈가 있다면 조선을 위한 투사가 돼라’는 유언을 남겼다”며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공익을 위한 길을 골라 묵묵히 걸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우리나라 근대 비영리의 출발선에 둘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비영리의 영속성, 연대와 신념에서 찾아야”

 

상해에서 시작된 탐방은 임시정부의 피난길을 따라 항저우, 자싱, 난징으로 이어졌다. 항저우는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 이후 시작된 임시정부 유랑시대의 첫 기착지다. 자싱은 김구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몸을 숨기고 살았던 피난처가 있는 곳이다. 임시정부의 환국 이후 중국에 남아 한국광복군·한인교포 관련 남은 업무를 처리한 주화대표단이 머물렀던 난징에서는 중국의 아픈 역사도 함께 살폈다. 1937년 일제가 난징시민 20~30만명을 학살한 난징대학살을 기록한 난징대학살기념관을 탐방했다.

 

비영리의 영속성’은 이번 탐방을 관통하는 주제였다. 상해부터 충칭까지 확인된 것만 열 두 번이나 청사를 옮기면서도 임시정부의 틀을 유지하며 독립운동한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두고 열띤 토론이 계속됐다.

 

서광(50) 밀알두레교육공동체 밀알두레학교 교사는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독립운동가들이 ‘민족주의’와사회주의’의 두 진영으로 갈라져 끝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실제로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 등 사회주의 진영 단체와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 등 임시정부 내 민족주의 단체는 1939년 좌우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원탁회의를 열었으나 끝내 결렬됐다. 서 교사는 “비영리 섹터에서도 각자의 에고(ego)가 너무 강해 서로 협력하지 못하는 부분이 늘 안타까웠다”며 “각자의 당위성에 의해 NPO들이 세워지지만, 연대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임팩트를 키우기 어렵다”고 말했다

 

 

 

중국 항저우 장생로 호변촌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 원래 2목조건물이었으나 해방 이후 중국인들이

거주하면서 3층으로 확장됐다가, 현재 다시 원형으로 복원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장지훈 기자

 

 

황혜승(46) 부산대천마을공동체 운영위원 겸 감동재협동조합 대표도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는 중국과 한국이 공동으로 항일 투쟁 전선을 만드는 국제적 연대의 시발점이 됐다”며 “지금도 345곳에 달하는 중국 내 임시정부 유적지를 중국 정부가 보존·관리하는 등 연대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인상깊다”고 했다.

 

비영리의 지속가능성은 결국 활동가의 마음가짐에 달렸다는 의견도 나왔다. 황병구 한빛누리재단 상임이사는 “임시정부 역사탐방은 선배들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어떤 역량을 발휘했는지를 발견하는 여정이라기보다 공익에 대한 열망의 깊이를 배우는 자리였다고 생각한다”며 “비영리가 자원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는 조금 더 영리해질 필요가 있지만, 사심 없이 미션을 추구한다는 비영리의 본질이 흐려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번 탐방을 기획한 공익경영센터의 이지현 센터장은 “각기 다른 분야에서 일하지만, NPO라는 공동의 울타리 안에 있는 활동가들이 임시정부의 여정을 따라가며 느끼는 각기 다른 인사이트를 공유하는 자리로 마련하고자 했다”며 “각자 NPO의 존재 이유를 찾고, 비영리 활동가로서의 자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장지훈 더나은미래 기자 jangpro@chosun.com]

출처: http://futurechosun.com/archives/45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