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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날의 흔적을 찾아서] 길 위의 임시정부, 가흥·해염·항주 등 독립운동 현장을 따라가다- 해염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9-11-04

 

[그날의 흔적을 찾아서] 길 위의 임시정부, 가흥·해염·항주 등 독립운동 현장을 따라가다

중부일보 신춘호기자 기사입력 2019.10.28

 

 

가흥 매만가와 일휘교, 임정요인·가족들의 행적 남아

탐방단은 가흥과 해염의 임정 가족들이 머물렀던 공간들을 답사했다. 김구피난처인 매만가에서 약 300m가량 떨어진 일휘교 17호에 임정 가족들의 거처가 마련되었다. 1층에는 전시실이 있고, 오른쪽에 주방이, 왼쪽에 응접실이 있다. 임정 가족들의 거처는 2층에 마련되었다. 김구의 모친 곽낙원 여사와 아들 김인, 이동녕, 박찬익, 김의한-정정화부부 가족, 엄항섭 가족들이 모여 살았던 2층에 당시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가구와 침구들이 복원되어 있었다. 거처지는 가족 단위로 살아야 했고, 쪽방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등불이 약해 당시의 사정을 연상시키듯 침울함마저 감돌았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 살아야 했던 시절, 임정 요인, 가족들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곳이어서 마음이 쓰이는 곳이다.

취재탐방단에 동행한 김미현씨가 김의한-정정화 가족 방으로 들어가 둘러보며 침대를 어루만졌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공간에 서 있는 셈이니 감회가 남달랐으리라. 그녀의 증조부는 조선 말의 관료이자 대한제국의 대신으로,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10월에 고관대작으로서의 지위를 내려놓은 채 아들 김의한을 데리고 상해로 망명한 동농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이다.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작고하였으며 만국공묘에 묻혔다. 할아버지 김의한(金毅漢, 1900~1964)과 할머니 정정화(鄭靖和, 1900~1991, <長江日記> 남김) 여사는 부부 독립운동가이자 임정 요인이었고, 아버지 김자동(90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선생은 일휘교 2층을 뛰어다니던 ‘임정소년’이었다. 할머니 품에서 컸다는 김미현씨는 어렸을 적 할머니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생활했다며, 할아버지 할머니의 침상을 어루만지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김구의 가장 밀접한 동지의 한사람이었던 엄항섭 가족과의 친분도 소개하면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교류가 지속되기를 소망했다.


재청별서에서의 반년

김구는 가흥에서 일본 밀정으로부터 추격망이 좁혀오자 위급한 상황을 맞았다. 피난처가 노출되자 피신처를 다시 물색했다. 해염의 재청별서(裁靑別墅)였다. 해염으로의 피신에는 저보성 선생의 며느리 주가예(朱佳?)와 그의 집안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주가예의 친정은 해염의 부호였다. 재청별서는 가흥 동남쪽 해염의 남북호(南北湖)에 위치한 해염 주(朱)씨의 별장으로 주가예 친정 별장이었다. 지금의 남북호풍경구 내에 있다.

주가예는 해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몸으로 산길을 걸어 해염의 재청별서로 김구를 안내를 했는데, 뒤따르며 당시의 정경을 바라본 김구는 활동영상(동영상) 기록이라도 할 수 있다면, 남겨서 영원히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자 했던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구는 후일 <백범일지>에서, "만약 나라가 독립되면 나의 자손이나 동포 누가 주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치 않으리오. 활동사진은 찍어두지 못하나 문자로나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쓴다."라고 했고, "나의 겨레는 저보성 선생 집안의 정성 어린 친절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당시의 절박함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한 그들의 고마움을 표현했다. 매만가에서 저보성 선생의 손녀를 만났을 때 김구의 마음을 헤아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구는 한적한 이곳에서 약 반년을 머물렀다. 임정의 책임있는 위치에 있던 몸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복잡한 심경이야 어쩔 수 없었겠지만, 몸은 편안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우리나라를 떠나 생활한 14년 동안 남들은 난징, 수저우, 항저우의 자연을 즐기고 이야기하는 말도 들었으나, 나는 상하이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서지 못해 산과 물이 그리웠는데, 이곳에서 매일 산에 오르고 물에 나가는 취미는 정말 유쾌하였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록 피신은 쉬웠을지라도 임시정부의 요인들과의 연락과 외부활동이 자유롭지 못해 반년 만에 다시 가흥으로 돌아갔다.




출처 : 중부일보(http://www.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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