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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부 기획] 3-1. 이봉창 열사는 황국신민을 꿈꿨다?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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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열사는 황국신민을 꿈꿨다? 

 


 
기사입력 : 2009-11-26 10:07   [ 상하이=맹창호.김한준 기자 ] 

지면 게재일자 : 2009-03-20   면번호 : 13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는 지독한 자금난과 인재난을 겪던 임시정부의 처지를 일거에 반전시킨다. 미국, 하와이, 맥시코 등 해외동포들도 적극적인 지원에 나선다. 중국은 임시정부를 일제에 대항하는 파트너로 적극 받아들인다. 

 



특히 중국내 한ㆍ중 양민족간의 감정악화가 봄 눈녹듯 사라진다. 일제는 만주의 개간과정에서 중ㆍ한 농민간의 사소한 충돌을 여론조작을 통해 왜곡, 과장해 민족대립을 조작했다. 일부 한국인 폭력배를 매수해 중국인 상인과 노동자를 무차별 습격했고 자극받은 중국인들이 중국내 한국인을 재습격함으로써 민족적 대립은 극에 달했다. 

 



일본은 이를 이용해 한국인의 항일의식을 반(反)중국인 감정으로 쏠리게하고 연대의식을 약화시켰다. 중국에서도 한국인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형성됐고, 독립운동도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봉창과 김구의 첫 만남은 상하이 보경리 4호(현재 상하이 임시정부기념관)에서 이뤄진다. 일본에서 무작정 임시정부를 찾은 이봉창은 김구에게“제 나이가 31살인데…(중략) 인생이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충 맛보았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해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한다”며 결심을 밝힌다. 

 



이봉창은 김구의 지시대로 1년 동안 상하이에서 일본인 철강기술자로 위장한다. 유창한 일본어 실력에 일본인 복장과 게다까지 신고 다니는 그를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술을 마시면 곧잘 일본 노래를 호방하게 부르며 놀아‘일본영감’이란 별명까지 얻을 정도였다(백범일지). 그가 임시정부에 들락거리자 이동녕은 김구는“직무수행에 소홀하다”며 호된 꾸지람을 내린다. 

 



김구는 이봉창의 주장대로 일왕 히로히토의 처단을 맡긴다. 폭탄구입과 운반 등 거사자금 1000달러(1000원)가 하와이애국단으로부터 지원된다. 김구와 이봉창은 선서식과 사진을 찍었다. 이자리에서 이봉창은“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저 이길을 떠나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를 찍자”며 위로한다. 

 



이러한 이봉창이 처음부터 독립운동의 선각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중). 그는 한때 능란한 일본어 실력으로 황국신민이 되고자 했다. 일본인의 양자가 되기도한다.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는 1925년 일본에 가면서 스스로 지은 그의 일본 이름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면‘조선인’이라는 출신성분은 그를 좌절시켰다. 수없이 취업을 거부당하고 임금과 승진차별을 받았다. 일왕 행렬을 구경하다가 한국인이란 이유만으로 9일씩이나 구금된다. 

 



그는 식민지인에게 황국신민은 얼마나 허구인지 5년간의 일본생활로 철저히 깨닿는다. 좌절과 분노 속에 왜 독립이 필요한지 자각한다. 그리고 실천을 위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찾아온다. 

 



그의 의거는 그 대상이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일왕이었고, 거사 장소가 일본의 수도인 도쿄의 치안을 책임지는 경시청의 현관 앞이었다는 점에서 비록 실패했지만 파장은 너무나 컸다. 독립자금과 청년들이 김구 주위로 몰려들었다. 김구는 이어 이덕주와 유진식에게 일본총독의 처단을 지시해 국내로 잡임시키고, 유상근과 최흥식은 혼조 시게루 만주 관동군사령관 등의 암살을 명한다. 이어 채소장사를 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를 보아오던 윤봉길에게는‘상하이 사변’승전을 자축하던 일제의 오만을 응징하도록 한다. 

 

상하이=맹창호ㆍ김한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