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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부 기획] 6. 1만5000리 역사투쟁(중)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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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의 연속 중일전쟁... 임정에겐 희망이였다 


[임정90주년]승리의 역사를 가다 


1만5000리 역사투쟁(중) 

 


 
기사입력 : 2009-11-26 10:07     [ 우한,창사,광조우,류조우=맹창호 기자 ] 

지면 게재일자 : 2009-04-10     면번호 : 13면  

 

 

 

1937년 7월7일 루거우차오(蘆溝橋)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중일전쟁에 거는 임시정부의 기대는 컸다. 전쟁으로 비록 먹을 것, 입을 것, 머무를 곳은 고사하고 늘 피란을 준비하는 긴장된 하루하루가 이어졌지만, 임시정부는 한국과 중국의 공동의 적인 일본과의 전쟁이 시작됐음에 고무됐다. 

 



같은 적과 전투를 벌이는 것은 더는 한국민에게 항일의 입장에서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독립운동가 양조우는 그의 일기에“비록 전쟁이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지만 한국민에게 중일전쟁은 희망의 전쟁이었다”고 회고했다. 덩치 큰 중국이 일본의 무릎을 꿇게 할 날이 곧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당시 일본의 힘이 약화한다는 것은 우리의 독립이 그만큼 빨라진다는 것을 뜻했다. 

 



중국에 비해 초기화력이 우세할 것이란 예측대로 일본은 개전 21일 만에 베이징을 점령하며 연전연승을 거뒀다. 8월에는 상하이에 대한 총공세(2차 상하이사변)도 시작됐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중국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9월 서안사변을 계기로 오랜 시간 공산당과의 내전을 멈추고 제2차 국공합작이 선포됐다. 적어도 중국은 명목상으로 일치단결해 일본과 전면항전을 벌였다. 특히 상하이를 지키는 중국 군인들은 열세적 무력에도 용감히 싸워 일본군을 거의 두 달이나 제자리에 묶어놨다. 

 



신속한 승리를 장담한 일본은 개전 5개월이 지난 12월에야 난징을 점령하자 분풀이로 30만 명의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1938년 5월 쉬저우(徐州), 10월에 광둥(廣東), 우한(武漢)이 떨어졌다. 뒤를 바싹 쫓는 일본군을 피해 임시정부는 창사(長沙), 광조우(廣州), 류조우(柳州)로 피란길을 나섰다. 대륙 전체가 전쟁터와 마찬가지였다. 

 


 

▲다시 희망을 품고 


임시정부는 중일전쟁 터지자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항일투쟁을 본격화 하기 위해 군사위원회를 결성한다. 본국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라디오 방송을 통한 선무활동에도 나섰다. 임정에 가담한 각 정당 단체들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光復陳線)를, 김원봉 등 좌파그룹은 그에 상응하는 조선민족전선연맹(民族戰線)을 각각 결성했다. 

 



한편으로 임시정부는 전쟁의 영향권에 들어간 쩐장(鎭江)을 비롯한 상하이, 항조우, 자싱(嘉興) 등에 흩어진 임정요인과 가족들은 난징으로 모이도록 소집령을 내렸다. 

 



100여 명의 대가족은 1937년 11월 목선을 타고 창사로 향했다. 난징에서 창사까지는 수로로 3000리(장강일기). 임시정부 가족들은 우선 배로 한코우(漢口)까지 가서 육로로 이동하기로 하고 창강(長江)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코우는 현재 우한삼진의 일부다. 

 



첫기착지인 안휘성 안징(安慶)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풍랑과 일본의 폭격을 피해 노인과 부녀자를 배에서 내리도록 한다. 이들은 몇몇씩 육로로 또는 수로로 한코우에 집결했다. 전쟁으로 물가와 운임은 부르는 게 값 이었고 배들도 모두 징발돼 100여 명의 대가족이 움직이기 어려웠다. 천신만고 끝에 임시정부는 난징을 떠나 50여 일이 지나서야 중국 최대호수인 동정호를 지나 창사에 도착했다. 

 



임시정부가 피란처를 창사로 정한 것은 무엇보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구는 당시 상황을 “100여 명의 남녀노소와 청년을 이끌고 사람과 땅이 생소한 창사에 간 이유는 단지 이곳의 곡식값이 극히 싼데다 장래 홍콩을 통해 해외와 통신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1938년 들어 창사도 점차 전란에 휩싸인다. 임시정부는 또다시 피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의 폭격은 남경에 이어 우한을 넘고 창사로 집중됐다. 임시정부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윈난성 쿤밍(昆明)으로 이전하기로 하고 창사를 출발, 7월20일 광조우에 도착했다. 

 



하지만, 광조우에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2개월여 광조우에 머무는 동안 임시판공처가 운영된 곳은 현재 동산공원으로 마작을 즐기는 노인들의 휴식처로 변했다. 광조우는 화난(華南)지역 최대 도시로 1920년대 혁명과 독립을 바라던 한인청년들이 대거 집결했던 곳이다. 황포군관학교 등 독립운동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921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신규식은 동교장(현재 광둥성 체육장)에서 쑨원(孫文)의 정식사절로써 접견의식을 갖기도 했다. 

 



광조우 역시 폭격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는 인근 남해현(불산)으로 옮겼다가 상륙하는 일본군을 피해 급히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1938년 10월 광조우시내와 남해현에서 각각 기선과 기차편으로 탈출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11월 말 광시(廣西)성 류조우에 이르러 체재를 정비한다. 

 



류조우에 우리 임시정부가 머문 시간은 5개월로 요인들이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됐던 낙군사에 임시정부 항일투쟁활동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임시정부는 이곳에서 광복군의 전신인 광복진선 청년공작대를 구성한다. 

 



중국인들은‘비단이 아름답고 미인이 많은 소주에서 태어나, 아름다운 항조우에서 살고, 과일과 음식이 풍성한 광조우에서 먹고, 류조우에서 죽고 싶다’할 정도로 류조우는 관(棺)을 잘 만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1939년 4월6일 임정소속 120여 명은 류조우를 떠나 귀양와 준의를 거쳐 3000리 길을 달려 같은 해 5월 3일 쓰촨성 치장에 판공처를 정한다. 치장은 국민정부의 임시수도인 총칭에서 불과 90㎞ 떨어진 소도시에 불과하지만 이미 김구 등이 중국정부와 협의해 마련한 거처에 숙소를 정하고 임시정부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피폐한 전쟁의 현실 


임시정부와 요인들은 전쟁의 피란길에서 일제와의 싸움이 치열해지면 치열해질수록 독립이 가까워짐에 희망을 걸었다.하지만, 현실은 현실. 중일전쟁의 격변기, 임시정부 요인들이 피란길에서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선 전쟁통으로 일자리가 없어졌다. 그것은 가족의 수입이 없어졌다는 의미다. 

 



많은 임정요인은 호구지책으로 직장을 다니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들의 수입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도 했지만, 임정의 활동도 돕는 자금원이기도 했다. 중국의 지원이 있었지만 100여 명이 넘는 대가족이 사용하기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고국에서 일제의 핍박 속에 살아가는 동포들의 삶보다는 나을 것이란 생각에 오히려 미안해했다. 

 



일제의 추적을 피하는 임시정부는 기다림에도 단련돼야 했다. 1938년 남해현을 탈출하는 과정에서는 중국정부의 통행 허가서를 기다리다 기관총 소리를 들으며 피란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몇십 분만 늦었어도 아무런 무장을 갖추지 않은 임시정부 요원들과 가족들이 모두 개죽음을 당할 뻔했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는 일본의 전투기에서 내쏘는 기관포를 피해 사탕수수밭으로 내달려야 했다. 류조우로 향하는 가운데 계평현 부둣가에서는 무려 20일간의 기다림이 이어졌다. 당시 임정요인과 가족들은 어디로 갈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오직 기다림이 전부였다. 

 

부둣가에서 그들은 찬거리를 사다가 노천 강변에 돌조각을 깔고 불을 지피고 가마를 걸고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고 선상에는 200여 명의 임정요인과 그 가족들이 함게 지냈다. 당시 피란을 떠났던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신세를 ‘흐르고 쉬이 마르고 답답한 기다림이 계속된 부평초’에 비유하기도 했다. 

 



피란처마다 계속된 공습도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켰다. 중일전쟁이 터지기를 기다렸던 기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일제의 무력은 놀라웠는데 그들은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 

 



일제의 공습을 피하는 독립운동가의 목숨은 자신의 것이되, 동시에 자신의 것이 아니기도 했다. 양조우는“한 달에도 몇 번씩, 아니 하루하루를 생명을 내놓는 경험을 하는데 공습이 울리면 그때마다, 피란처를 찾아 숨는 그때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고 당시의 절박한 심정을 회상했다. 

 

우한,창사,광조우,류조우=맹창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