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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부 기획] 6-1.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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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다” 


김구母 곽낙원 여사 

 


 
기사입력 : 2009-11-26 10:07     [ 창사=맹창호 기자 ] 

지면 게재일자 : 2009-04-10     면번호 : 13면 

 

민족의 큰 지도자 김구는 해방된 조국에서 동포의 손에 암살됐다. 그의 삶이 암살의 표적이긴 했지만 동포에 손에 목숨을 내줘야 했다는 사실은 우리역사에 끝내 아쉬움으로 남고 있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지휘하면서 일본 영사관의 사주를 받고 그를 암살하려는 동포가 찾아와 권총을 내놓고 간 사실도 있었다. 독립운동을 지휘하면서 의견을 달리하는 현명난류의 손에 저격당해 생사의 갈림길에 서기도 했다. 

 



1938년 5월 6일 난징에서 창사로 피신한 김구는 임시정부를 구성하던 3개 주요정당의 통합을 논의하고자 조선혁명당 본부인 난무팅을 찾는다. 이 자리에는 중일전쟁 직후 난징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를 구성한 한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3당 대표가 통합문제 논의에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조선혁명당 간부출신인 이윤한이 권총을 발사했다. 맨 먼저 김구가 가슴에 총탄을 맞았고 이어 현익철, 유동열, 지청천의 차례로 저격당했다. 현익철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지청천은 다행히 경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은 김구와 유동열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시로써는 장사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상아의원이었다. 

 



이운환은 사건 직후 장사를 빠져나가다 기차를 되돌린 중국 당국에 검거됐다. 이어 공모혐의자 강창제, 박창세, 이창기 등이 체포되지만, 전시 혼란 중 공범들은 보석으로 석방됐고, 이운환마저 탈옥해 사건은 베일에 싸여 진다. 

 



응급실에 실려간 김구는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는다. 상태를 살피본 의사가“가망이 없다”며 응급조치는 물론 입원수속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상하이 공작을 위해 홍콩에 있던 아들과 동지 안공근에게 비보가 전달된다. 김구는 돌보는 이 없이 무려 4시간 동안 사투를 벌였다. 그리고 질긴 목숨을 이어 다시 한국독립운동의 중심에 선다. 

 



장제스 등 중국정부는 김구의 치료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정성껏 보살핀다. 현장에서 즉사한 현익철은 국장의 예로써 악록산에 안장됐다. 2차례나 일제에 체포되고도 평생을 무장독립운동에 몸바친 그는 허망하게 동포 혁명난류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취재 중 김구의 병상기록을 찾으려고 하루를 꼬박 내 상아의원의 당안관관계자들과 접촉했지만 아무런 소득을 올릴 수 없었다. 관계자로부터“중일전쟁 당시 4차례에 걸친 창사대회전에 병원이 집중적인 공습을 받아 모든 기록이 불탔다”는 설명만 들어야 했다. 

 



상아의원은 일본군을 피해 총칭(重慶)으로 옮겼고 항일전쟁에 승리한 이듬해인 1946년 창사로 되돌아와 이후 기록만 존재했다. 유감스런 일이었지만 김구의 암살사건과 관련된 모든 기록이 사라진 셈이다. 이 사건도 진상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일본의 사주설까지 제기됐지만 이보다는 만주에서 고군분투하던 조선혁명군을 외면하듯 임시정부가 창사에 머무른 사실에 대한 불만표출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구는 한 달 만에 병원에서 퇴원해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뵙는다. 그녀는“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한다”며“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범인이 한국인이니 한인의 총을 맞고 산다는 것은, 일인의 총을 맞고 죽느니만 못하다”고 말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 돌아온 김구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창사=맹창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