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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부 기획] 8. 대륙에 묻힌 영혼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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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中묘지 쓰레기매립장 둔갑... 묻혀버린 독립 혼 


[임정90주년]승리의 역사를 가다 


8. 대륙에 묻힌 영혼 

 


 
기사입력 : 2009-11-26 10:07     [ 충칭,상하이=맹창호 기자 ] 

지면 게재일자 : 2009-04-24     면번호 : 11면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당시 이승만 국무총리는 44세다. 내무총장 안창호를 비롯한 임시정부 6부의 총ㆍ차장 나이는 25∼61세. 이들 13명의 국무위원 평균연령을 계산해보니 40.7세 였다. 1900년대 들어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36세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임정요인들은 대부분 이를 넘긴 상태였다. 

 



더욱이 임시정부는 광복에 이르기까지 26년 4개월의 긴세월, 항일투쟁을 벌였다. 

하나, 둘 일제에 희생되거나 병마와 과로로 쓰러졌다. 안타깝게도 일부는 오랜시간에 지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이 패망하고 환국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기력이 다해 어이없이 고국땅을 밟지 못하기도 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하이를 탈출한 임시정부가 8년의 피신생활을 끝내고 총칭에 안착한 것은 1940년. 1919년 3.1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중국에 망명해 30∼40대에 임시정부에 참여했다면 이때는 환갑을 바라보거나 이미 넘긴 나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억만리 외국 땅에서 한많은 인생을 마감해 유해로 돌아와야 했다. 

 



 
▲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임시정부와 상의하기 위해 상하이로 왔다가 병사한 안태국 선생의 1920년 4월 14일 장례식 모습. 

 

 


 

하지만, 유해만이라도 고국에 돌와왔다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국립묘지라도 안치돼 돌봐줄 후손이나마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상하이 만국공묘와 충칭 화상산 한인묘지에는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발굴이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방치되고 후손들이 나몰라라 하는 사이 한인묘지는 쓰레기매립장이 되버렸다(본보 3월2일 1면‘쓰레기에 묻힌 독립영웅의 혼’참조). 음식찌꺼기를 찾아 해메는 들개들의 놀이터가 되버린 셈이다. 일제에 해방된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독립영웅들은 철저히 외면되고 있었다. 

 



▲상하이 만국공묘의 한 

 



상하이는 아편전쟁 직후 남경조약(1842)에 따라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조계지가 만들어지면서 외국인 거주자가 급격히 늘자 외국인 공동묘지가 조성된다. 이곳은 만국공묘로 쑨원(孫文)의 부인이자 부주석을 지낸 송경령이 1981년 세상을 뜨자 안장된 곳으로 기존의 이름 대신 현재는 송경령능원으로 바뀌었다. 

 



지난 2월 비가 내린 가운데 방문한 송경령능원은 잘 다듬어진 기념관과 같았다. 만국공묘답게 상당한 규모일 것을 기대했지만 등소평이 썼다는 기념비만 거대할 뿐 외국인묘원은 600여 기의 평분이 줄 맞춰 늘어있을 뿐이었다. 

 



이곳에 한국인의 묘로 확인 또는 추정되는 경우는 경우는 모두 14기다. 이 가운데 노백린, 박은식, 신규식, 안태국, 김인전 등 5기는 1993년 8월에 윤현진, 오영성 등 2기는 1995년 6월에 봉환됐다. 봉환된 자리의 묘지석에는 이장된 날짜가 별도로 새겨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임시정부 초기에 활동한 주요 독립운동가들로 보다 치열한 항일운동을 위해 망명을 선택했고 죽어갔지만 한중수교(1992년 8월 24일)이전까지는 국내로 모셔지기 어려웠다. 

 



이곳 외국인 묘원에는 슬픈 사연이 하나 있다.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 선생이 아직도 환국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대한제국 농상공부대신 출신으로 경술국치 당시 일제로부터‘남작’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작위를 부끄럽게 생각했고 이를 반납했으며 3.1운동 이후 대동단 총재를 맡아 항일운동에 본격 나서고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도왔다. 

 



 
▲ 충칭(重慶) 화상산의 한인묘지에는 독립지사와 가족들이 묻혀 있지만 수십년째 돌보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생활쓰레기에 뒤덮이고 있다<왼쪽 사진>. 목사로서 평북 용천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이다 숨진 임시정부 국무위원 송병조의 국장 장례식 모습. 

 


 

대표적 개화파 관료였던 그는 무장투쟁노선을 주장해 북로군정서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 당시 망명한 대한제국의 관료중에 가장 고위직이었다. 더욱이 74세의 고령이었지만 안창호가 파견한 특파원의 안내로 아들과 임시정부로 망명해 세계 언론을 향해 경술국치의 부당성을 폭로했다. 그는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을 망명시키려다 실패했다. 

 



비록 그는 고령으로 오랜시간 망명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1922년 7월 4일 상해에서 77세의 일기로 임종했지만 그의 아들 김의한(건국훈장 독립장)과 며느리 정정화(건국훈장 애족장)가 독립운동을 평생 이었으며 손자 김석동(건국훈장 애족장)은 광복군으로 항일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김가진의 무덤은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이 봉분과 비석을 파괴해 흔적이 없지만 손자인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이 생존해 위치를 알고 있다. 

 



많은 독립운동사 연구가들은“김가진은 선친일 후항일의 대표적 케이스로 그의 망명은 임시정부가 이미 그를 사면했을뿐 아니라 독립운동가로 받아들인 것”이라며“항일운동에 대단한 업적을 남긴 분에게 아직도 포상을 주저하는 것은 이해할 수없는 일로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쓰러져간 독립 혼 

 



1938년 5월 창사(長沙)난무팅(楠木廳)에서 현익철 선생은 노선에 불만을 품은 이운환에게 피격돼 숨을 거뒀다. 그와 함께 합당을 논의하던 김구도 저격을 입고 한달간 생사를 헤맸다. 1939년 4월에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여사가 애석하게 숨을 거둬 화상산 한인묘지에 묻인다.곽 여사는 아들 김구에게“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공향에 묻을 것(백범일지)”을 당부한다. 그녀의 당부는 1946년이 되어서야 이뤄졌다. 

 



1940년 3월에는 천안 출신으로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임시정부의 큰 어른이자 김구의 정치적 후견자 이동녕 선생이 치장 임시정부청사에서 71세로 작고했다. 그는“한국동포의 화합”을 마지막 주문으로 남겼다. 노 애국투사의 마지막 길은 쓸쓸했고 평생 걸어온 가시밭길에 비해 일제의 식민지 국민이라는 굴욕적인 처지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의 유언대로 서거 2개월 후 임시정부 산하 세 정당인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은 한국독립당으로 통합 중앙집행위원장에 그의 정치적 분신인 김구를 선출한다. 

 



 
▲ 만국공묘는 1981년 송경령능원으로 개칭됐는데 1910~1930년대 상하이 외국인 공동묘지로 조성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묻혀있다. 

 


 

1942년 2월에는 송병조 선생이 65세를 일기로 서거한다. 그는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과 임시정부 고문, 회계검사원장으로 7인의 국무위원 가운데 5인이 국무위원직을 버렸을때 차리석 위원과 단둘이 임시정부를 고수했었다. 

 



독립운동가들의 애석한 죽음 가운데는 조소앙의 부모의 죽음은 모든 애국지사들의 마음을 아파게 했다. 조소앙의 부친은 1939년 11월 치장에서 고요히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신은 실종 이틀만에 강변 늪에서 발견돼 20여일전 먼저 죽은 부인의 묘에 합장됐다. 

 



당시 상황을 독립지사 양조우는“낮선땅에서 부인을 잃고 나신 노인이 느꼈을 허전함과 두려움 탓이었을까? 고향땅에 묻이는 것이 소원이었던 그는 소원을 스스로 저벌릴 정도로 절망스러웠나? 낮선땅에 또 하나의 슬픈 영혼을 묻고 말았다. 희망을 잃은 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현실속에 삶과 죽음의 모습이 동시에 그리도 다른 갈림길을 만든 채 뻗어져 있었다. 같은 시간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라며 애석해 했다 

 



송병조와 함께 국무위원 2명만으로 임시정부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냈던 차리석 선생은 1945년 9월9일 충칭에서 서거했다. 해방된 조국의 고행갈 날을 손꼽던 노 투사는 기력이 다하자 육신을 남긴 채 영혼이 되어 누구보다 먼저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는 원로들의 생은 너무도 비참했다. 그나마 광복 이후 고국으로 모셔진 유해는 다행이다. 아직도 많은 유골들이 이억만리 중국 땅에서 묻혀있어 그들 후손들에게는 천추의 한이되고 있다. 

 

충칭,상하이=맹창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