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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부 기획] 9-1. 동병상련의 아픔 나눈 아일랜드人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2-06-26

동병상련의 아픔 나눈 아일랜드人

 

기사입력 : 2009-11-26 10:07 [ 천안=맹창호.김한준 기자 ] 지면 게재일자 : 2009-05-01 면번호 : 13면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중국의 국경도시 안둥(安東)현. 지금은 단둥(丹東)으로 지명이 바뀐 이곳은 중국망명의 길목이었다. 3.1운동 직후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로부터 파견된 특파원의 안내에 따라 이곳에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배를 타고 망명길에 올랐다.  

 

김구 역시 15명의 동지들과 조국을 탈출했는데“안동현 어느 여관에서…(중략) 7일을 보낸뒤 이륭양행 배를 타고 상하이로 출발했다. 황해안을 통과할 때 일본 경비선이 나팔을 불고 따라오며 세울 것을 요구했지만 영국인 함장은 들은 체도 않고 전속력으로 경비구역을 지나 4일 후 무사히 상하이 황포강 나루에 닻을 내렸다”며 당시의 긴박함을백범일지에 소개하고 있다.

 

▲ 유병호 중국 다롄대교수는 임시정부 안동교통지부인 이륭양행은 지금까지 알려진 건강교육소<사진 상>가 아니라 200여m 떨어진 제1경공업국 건물<사진 하>이라며 최근 철거전 모습을 공개했다.  

 

일본 경비선의 정지명령에도 독립운동가들을 지켜준‘영국인 함장’은 에이레(아일랜드)출신의 죠지 엘 쇼우(Gorge L Show)다. 영국 태고(太古)선박회사의 단둥대리점 이륭양행의 지배인이었던 그는 1919년 5월 상하이 임시정부가 국내와의 연락기관으로 교통국지부를 설립하자 자신의 회사건물 2층을 사용토록 했다.

 

아일랜드 역시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항해 오랜기간 싸워온 터라 쇼우는 우리 독립운동에 깊은 동정을 보였고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일본의 작위를 반납하고 대동단 총재로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펼쳤던 동농 김가진도 쇼우의 배인 계림호를 타고 임시정부로 망명(장강일기 中)했다. 쇼우의 배려로 안동교통지부는 국내와 만주 독립단체간의 비밀통신, 임시정부 자금모집, 정보수집, 무기반입, 독립운동가 소개 등 이른바 모든 비밀임무를 담당할 수 있었다.  쇼우는 임시정부뿐 아니라 의열단도 적극 지원했다. 의열단은 작탄테러를 목적으로 200개의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는데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의열단원 김산은 님 웨일즈의‘아리랑’에서“폭탄은 안동의 영국회사 앞으로 보내는 의류품 화물상자에 넣어 이륭양행 소유의 기선에 실었다. 주인은‘샤오’라고 불렸다. 그는 일본인을 영국인만큼이나 싫어했다. 그래서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 독립운동을 열렬히 지원해 주었다.…(중략) 그는 돈은 한푼도 받지 않고 스스로 한국을 도왔다”고 회고했다.  

 

때문에 쇼우는 의열단에게 전설적 인물이다. 의열단원은 그의 배로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벌이다 위험할 때면 비교적 안전한 그의 집에 숨었다. 일본의 추격으로 어려움에 빠지자 쇼유는 검거되지 않은 단원을 태워 텐진과 상하이로 탈출하도록 도왔고 1920년 7월, 체포돼 서울로 압송됨에 따라 직업까지 잃는다.  그의 체포는 영국과 일본의 외교적 마찰로 비화되고 수개월의 협상 끝에 1920년 11월 보석금을 내고 석방된다.

 

쇼오는 석방된 후 안동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는 1921년 1월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환영회에서“한국의 독립을 위해 이런 희생을 한 것이 자랑스럽고 기쁘다”고 말한다.  일본경찰의 정보보고인‘조선치안상황’에서는‘쇼우가 임시정부로부터 대소 2개의 금색 공로장을 받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 쇼우의 이후 행적은 영국으로 돌아갔다는 사실 뿐 아무런 흔적도 남기고 있지 않다.

 

이륭양행이 있던 장소도 그동안 단둥 시 건강교육소 건물로 알려졌지만 최근 유병호 중국 다롄대 교수에 의해‘단둥 시 해관 인근의 시 제1경공업국 건물로 확인됐지만 이 마저도 1996∼1997년께 철거된 뒤 고층아파트 인근의 공원의 일부로 변해 이제는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물론 외국인으로 임시정부를 도운 이는 쇼우만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후손이라도 찾아내 감사의 뜻을 전한다면 이는 민족의 빚을 갚는 일이다.

 

맹창호ㆍ김한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