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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부 기획] 11. 좌우연합정부의 수립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2-06-26

굳은 독립의지 서린 그 곳... 이젠 스산한 바람만 [임정90주년]승리의 역사를 가다 11, 좌우연합정부의 수립

 

기사입력 : 2009-11-26 10:07 [ 충칭,옌안=맹창호 기자 ] 지면 게재일자 : 2009-05-22 면번호 : 13면

 

  3.1운동 이후 중국에서 열린 독립운동단체 통합은 모두 6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1919년 임시정부의 통합, 1923년 국민대표회의, 1926 민족유일당, 1935년 민족혁명당, 1939년 8월 치장 7당 및 5당 회의로 이어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다섯 차례의 시도는 결론적으로 모두 실패였다.

 

임시정부를 둘러싼 통일전선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노령 대한국민의회 사이에 1921년 좌익 지도자 이동휘의 국무총리 사임으로 분열됐다.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좌익이 주도한 창조파가 임시정부의 해체를 요구하다 민족진영의 개조파와 충돌해 통합을 이뤄내지 못했다. 민족유일당운동에서는 혁명정당으로의 발전을 전망하는 좌익진영과, 임시정부의 강화를 모색한 민족주의 진영의 노선차이가 통합의 걸림돌이었다. 더욱이 1차 국ㆍ공 합작이 결렬되자 양 독립운동 진영도 갈라서게 된다. 치장의 7당 회의에서도 주의와 당파를 초월해 역량을 집중한‘단일당 조직’에 대해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민족전위동맹이 연맹체 결성을 주장하며 탈퇴해 결렬된다.

 

▲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지<왼쪽 사진> : 1932년 상하이에서 의열단, 조선혁명당 등 5단체 대표가 모여 통일전선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을 협의한 상하이 동방여사 옛 부지로 현재 공원조성을 위해 건물은 철거됐다.

 

광복군 제1지대 거주추정지 : 조선민족연맹이 조직한 조선의용대는 1942년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는데 주변 대부분이 고속도로 개통과 아파트 건설로 사라지고 있다. 이렇듯 좌익과 우익 혹은 민족주의 진영이 통합을 이루지 못한 것은 표면적으로 임시정부의 위상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으로 나타난다. 실제 좌익은“합법적 선거도 없었고 국토와 인민이 없는 상황에서 정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임시정부에 불관주의(不關主義) 노선을 고수했다. 그러나 본질적 문제는 이념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데 있었다.

 

당시 우리뿐 아니라 피압박민족들에게 이념대립은 일종의 숙명처럼 이어졌다. 서로 다른 세계관, 정치적 이념, 계급적 이해가 상충해 때로는 제국주의적을 놓고도 서로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분열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임시정부와 좌익 양 세력은 끊임없이 서로 연합하려고 노력했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다가도 기회만 주어지면 세력을 합작하려는 시도를 버리지 않았다.

 

심지어 김구의 아들 김인은 좌익인 김원봉 밑에서 일한 적도 있으며, 김원봉은 재혼 당시 김구를 주례로 모시기도 했다. 더욱이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에서 이를 이끌어 나가는 임시정부에게 좌우합작은 숙제와도 같은 일이었다. 이 같은 노력으로 1942년‘좌우합작 임시정부’가 탄생한다. 물론 이 과정에 세계정세의 변화와 중국정부의 지원과 독려가 있었지만, 좌우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김구와 임시정부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광복진선과 민족전선 일제의 만주침략과 만주괴뢰국 수립은 독립운동의 중심을 만주에서 중국관내지역으로 옮긴다.

 

이후 독립운동세력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약칭 광복진선)와 조선민족전선연맹(약칭 민족전선)을 중심으로 양대진영이 구성된다. 우익 또는 민족진영의 광복진선에는 김구를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있었고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뒷받침 했다. 좌익인 민족전선은 김원봉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청년전위동맹이 있었다.

 

그런데 중국 내 독립운동단체가 대부분 정당명칭을 사용함으로써 마치 정파에 의해 사분오열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26년 민족유일당운동 이후 독립운동단체 대부분 정당명칭을 사용하는데 이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이당치국(以黨治國.당을 중심으로 통치한다)의 영향에서 비롯됐다. 특히 독립운동단체들의 정당표방은 일제침략에 대항하는 저항적 민족주의에서 근대 민족국가건설 단계로 발전해 갔음도 보여주는 근거다.

 

▲ 제34차 임시의정원 : 1942년 10월 시행한 의원 선거 좌.우파를 모두 아울러 46명을 선출한 제34차 임시의정원 기념사진.

 

앞줄 맨 오른쪽이 좌파의 대표격인 김원봉이다.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으로 독립운동단체가 정리되자 전체 독립운동통일전선 요구가 거세졌다. 특히 중국의 2차 국ㆍ공 합작은 전면적인 항일전쟁으로 이어지면서 독립운동도 통일이 요구됐다. 1941년 12월 일본의 하와이를 습격으로 터진 태평양전쟁은 독립을 이룰 절호의 기회로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한 곳으로 집중시킬 필요성이 절박했다.

 

 

독립운동진영 모두가 충칭에 정착한 이후 민족진영은 광복진선의 통합에 나서 산하 3당의 조직체를 완전히 해체하고 1940년 5월 한국독립당(이하 한독당)을 창당해 임시정부를 유지 옹호하는 기초세력인 여당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해 10월에는 개헌을 단행해 1927년 이래 국무위원회 중심의 집단지도체제를 주석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로 바꾼다. 강력한 지도체제를 확립해 국가원수와 국군통수권자로서 지위를 보장받아 독립운동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조치다. 반면, 좌익은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가 화북에 진출하는 등 세력이 분열된데다 중국정부의 지원마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일화되자 크게 위축됐다.

 

민족전선에서는 김성숙이 이끌던 조선민족해방동맹이 1941년 12월“반일혁명역량을 임시정부로 집중시켜 전 민족의 총단결을 이룰 것”을 선언한다. 이어 좌파진영의 대표격인 조선민족혁명당(이하 민혁당) 역시 전당대표대회를 통해‘불관주의’포기와 함께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한다. 물론 연합정부수립 과정에서 적지않은 파란도 일어났다. 이른바‘김구암살음모’가 그것으로 1943년 4월 민혁당 왕통 등이 임시정부 경위대원을 매수해 권총을 마련해 김구 등 한독당 영수를 암살을 기도하려 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는 진상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가운데 한독당과 민혁당의 치열한 진실공방을 가져오기도 했다. 하지만, 독립운동에 이념과 노선을 달리한 좌우와 민족진영은 결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전선을 형성했고 이에 따라 1919년 수립 당시 민족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 최고기구로의 위상과 권위를 완전히 되찾게 됐다. 단국대 한시준 교수는“좌우연합정부를 형성한 충칭시기 임시정부는 어느 시기보다도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고, 민족의 의사와 권력을 대표하게 되었다”며“한민족이 통일 단결된 모습으로 해방을 맞았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한의미가 있다”고 지적했다.

 

▲통일전선의 수립 연합정부는 당(의정원)ㆍ정(정부)ㆍ군(광복군)이 하나를 이루는 실질적 통합체를 일궈나갔다. 우선 군의 통합이 광복군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민혁당 등 좌익진영은‘선 정치 후 군사통일’을 임시정부는‘선 군사 후 정치통일’의견을 달리하자 중국 군사위원회가 개입했다. 결국, 임시정부의 주장대로 조선의용대가 우선 광복군에 편입하고, 의정원과 임시정부에 민족전선이 참여하기로 이를 받아들였다.

 

조선의용대는 1942년 7월 광복군 1지대로 개편된다. 대장인 김원봉은“조국해방을 위해 민족적 역량을 총집결해야 하고 한국인민은 마땅히 광복군에 참여해야 한다”며 지대장 겸 총사령부 부사령에 취임한다. 이로써 광복군은 1941년 무정부주의세력인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조선의용대를 편입시킴으로써 중국 관내 무장세력을 모두 통일했다.

 

▲ 7당통일회의 개최지 : 1939년치장에 모인 김구와 김원봉이 나서 동지동포제군에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며 7당통일회의가 개최된 영산빈관 자리로 옛 건물은 철거돼 중산로소학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어 정치통일이 진행됐다. 임시의정원에 선거규정이 새롭게 마련돼 의원 수가 기존 23명에서 46명으로 2배 늘었다. 1942년 10월 시행한 의원선거에서 한독당은 29명, 민혁당 10명, 조선혁명자연맹 2명, 조선민족해방동맹 2명, 무소속 3명 등이 선출됐다. 이들은 제34차 임시의정원에 참여함으로써 처음으로 좌우연정에 따른 의회가 열린 게 된다. 이때부터 임시의정원은 한독당이 여당을, 나머지 민족전선 3당과 무소속이 야당형식을 갖추게 됐으며, 의회정치의 새로운 경험과 한국 정당발달과 및 정당정치의 기원을 이뤘다.

 

임시정부도 좌우연합으로 구성된다. 우선 정부조직과 기능을 확대해 부주석제를 신설하고 주석의 보좌와 유고에 대비하고 국무위원을 기존 최대 10명에서 14명으로 증원한다. 행정부서도 5개에서 7개로 증설했다. 주석은 종전처럼 한국독립당의 김구가, 신설된 부주석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이 선임된다. 국무위원 14명 가운데 한독당이 8명, 민혁당이 6명을 차지한다.

 

행정부서 7개 가운데 군무부장에 김원봉, 문화부장에 최석순이 선임되는 등 2명이 배치된다. 임시정부 부서직원 96명 가운데 좌익진영 43명이 배정된다. 이처럼 좌익진영이 임시정부에 참여해 의정원과 정부, 광복군에 참여함으로써 독립운동세력은 임정 중심의 통일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좌우연합 임시정부는 이어 연안의 독립동맹, 만주에서 연해주로 후퇴한 김일성 부대, 국내 건국동맹과도 통합을 추진해 나갔다. 1944년 10월 국내비밀공장을 위해 국내공작위원회를 설치하고 특파원을 파견했다는 증언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국내 건국동맹 등에서도 임시정부와 협동전선을 위해 최근우를 파견했지만, 북경에서 일제의 패망을 맞는다. 연안과 연해주, 국내를 연계하려던 김구의 노력은 일제의 패망으로 구체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충칭에서 좌우연합정부를 수립하고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이 서로 통일을 이루려 했던 노력은 해방시기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좌우가 민족해방을 목표로 연합을 모색해 간 좌우연합정권의 성격이 강했다. 우파만의 정부가 아니었다.

 

충칭,옌안=맹창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