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김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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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부 기획] 15. 독립.통일 위해 평생 바친 건국의 지도자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2-06-26

독립.통일 위해 평생 바친 건국의 지도자 [임정90주년]승리의 역사를 가다

 

기사입력 : 2009-11-26 10:07 [ 천안=맹창호 기자 ]

지면 게재일자 : 2009-06-19 면번호 : 13면 

 

임시정부가 일본의 패망소식을 접한 것은 일왕의 무조건 항복 5일전인 1945년 8월 10일이다.

 

김구는 미 OSS와 공동으로 국내진공훈련을 마친 광복군을 점검하고 작전을 협의하기 위해 충칭(重慶)에서 시안(西安)에 갔다가 산시성(陝西省) 쭈샤오저우(祝紹周)주석의 저녁식사 초대를 받는다. 이 자리에서 쭈 주석은 긴급전화를 받고 일본의 항복소식을 김구에게 전달한다.

 

칼을 가는 동안 적이 죽어버린 셈이다. 김구는 이 소식에“수년 동안 애써 참전을 준비한 것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중략)

 

계획을 한번 실시해보지도 못하고 외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며 당시의 비통한 심정과 주국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백범일지에 남겨 놓았다. 임시의정원 양조우 예결위원장도“일본이 무조건적 투항했다는 소식이 중경에 도착한 것은 오늘, 10일 저녁 8시쯤이었다”고‘제시의 일기(시리즈 7부, 독립운동가 부부의 기록 참조)’에 기록하고 있다. 이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일제의 항복소식을 접한 일자와 시간을 분명히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이기도 하다.

 

▲ 상해시절 단란한 김구의 가족사진(김구는 이 시기를 가족들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임시정부의 환국은 쉽게 이뤄지지 못했다.(본보 6월 12일자 제14부. 개인자격으로 환국해야 했던 임정 참조) 해방 3개월 여 만인 1945년 11월 23일에야 상하이를 이륙한 미 공군의 C-47기가 서울공항에 내렸다. 승강기 문이 열리고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 속에 트랩을 내린 김구는 흙 한줌을 움켜쥐고 고국의 냄새를 맡았다. 1919년 신의주를 거쳐 단둥의 이륭양행 화물선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일제의 검거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한지 27년만의 귀환이었다.

 

▲대의를 버려선 안된다 김구의 인생철학은 정도론(正道論)으로 규정할 수 있다. 내가 살기위해 대의를 버려서는 안된다는 게 임정을 이끌어온 김구의 생각이었다. 그의 사상적 핵심은‘애국주의’‘민주주의’‘문화주의’를 바탕으로 한‘민족통일’이다. 김구는 19세에 황해도 팔봉의 동학접주로 처음 사회운동에 참여한다. 산포수를 중심으로 700명의 동학군을 이끌었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에 쫓기는 신세가되자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인 안태훈 진사에게 의탁한다. 안 진사는 김구와는 반대로 동학군을 토벌하는 의려소를 세었는데 김구에게 밀서를 보낸다. 민족끼리 피를 흘리지 말자는 내용과 더불어‘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진다면 서로 돕는다’는 밀약을 맺었다. 안 진사는 찾아온 김구에게 살집을 마련해주고 부모를 모셔오도록 주선하는 등 후한 대접을 했다.

 

▲ 서울 백범기념관 전경. 이때 김구는 자신의 평생 스승으로 모시는 유학자 고능선을 만난다. 고능선은 안 진사가 의병을 일으키면서 모사로 삼은 선비로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그의 가르침에 대해“고 선생의 말씀은 내게 주리던 아이가 어머니 젖을 빨아먹는 것과 같았다. 밥을 안먹어도 배고픈줄 모르겠고, 죽으라면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고능선은 경서를 통해 김구를 가르키기 보다는 중요점을 추라는 구전심수(口傳心受)의 교법을 선택해 의리에 대해 강론하고, 견문을 넓이기 위해 청나라로의 여행을 추천한다. 김구는 이 여행길에 명성황후의 피살소식을 듣게 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처단해 교수형을 받았지만, 고종이 이를 결재하지 않아 2년여 미결수로 수감돼 있다가 탈옥했다.

 

김구는 감옥에서 서양서적을 통해 신문명을 깨우치고 유학자에서 개화사상가로 변신한다. 그는 1911년 황해도 안악에서 신민회에 참가했다가 15년 형을 선고받고 4년여 만에 출옥해 농민운동 및 개화운동을 주도하다가 1919년 3.1운동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김구의 정치적 정체성은 그가 상ㆍ하권으로 집필한 백범일지에 수록된‘나의소원’을 통해 알 수 있다. 1947년 11월 유엔감시아래 남북선거에 의한 정부수립 결의안을 지지하며 발표된 논문으로‘민족국가’,‘정치 이념’,‘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라는 세 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 김구가 안중근 의사 의거일인 1948년 10월26일 쓴 글로 내용은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때 함부로 걷지말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김구가 원하는 우리나라의 첫 머리를 소개하면,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 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김구는 이 논문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 국가, 공동체의 이상을 정연하게 펼쳤고 문화국가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백범일지는‘금서’라는 딱지가 붙어 발간을 하지 못했다. 결국 4.19혁명 이후에야 햇볕을 보게 된다.

 

▲마지막 독립운동은 통일 1948년 4월 19일 오후 6시40분. 뉘엇뉘엇 서산을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노구의 김구는 38선 팻말을 배경으로 기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첫술에 배불를 수야 있겠소. 동족상잔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만나서 얘기를 해봐야 되지 않겠소”불과 5분의 짧은 회견이었지만 그는 통일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 북으로 향했다.

 

북에 도착한 김구는 언론담화를 통해“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 자주와 민주도 없다”며“분단은 대중에게 기아를, 가정에는 이산을, 동족에게 상잔까지 안기고 이로 인해 국제관계 즉, 미소관계가 악화된다”고 경고했다. 그의 우려는 현실로 드러나 서거 1년여 만에 한반도에는 6.25란 민족상잔의 비극에 휩싸여 60년이 되도록 서로의 앙금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1945년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됐다. 하지만 이해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발표되고, 이듬해 좌우합작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이승만은 정읍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이때부터 남한내에는 극심한 이념대립이 이어지고 1947년 7월 여운형이, 12월에는 장덕수가 피살된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단독정부를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무차별적 테러가 이뤄줬다. 김구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회담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내고 남한 총선거에 불참할 것을 표명한다. 그리고 남북연석회의 참여를 위해 북행을 선택했다.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연설을 통해 김구는 남과 북 모두의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했다.

 

이어 미소 양군의 철수후 통일정부 수립을 제안했다. 그는 1949년에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서울에서 남북협상을 열것을 제안한다. 그에게 민족통일은 70여 평생을 독립운동가로 살아온 마지막 독립운동이었다. 김구는 민족주의자로 좌와 우를 가리지 않았다. 어쩌면 이때문에 그가 암살됐는지도 모른다. 김구가 암살당함으로써 남북간에는 첨예한 대립만 존재하고 대화가 사라진다.

 

따라서 남북간의 대립을 강력히 바라고 부추겨 오늘날까지 이어온 세력이 있다면 이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그는 반통일 세력의 흉탄에 숨졌지만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했던 그의 정신은 국민 모두의 가슴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김구의 국민장은 10일간 치러졌는데 서거를 안타까워하는 애도가 전국에 가득했다. 장례 당일 서울의 모든 상가가 철시했고“영구가 떠나자 경교장 주변은 오열의 파도와 설음의 바다로 화하였다”고 언론들은 당시 분위기를 전하고있다.

 

/맹창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