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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김구를 백인으로 변장시켜…‘상하이 탈출’ 도운 美 선교사 부부 - 문화일보 2025.08.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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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admin | 작성일 | 2025-08-14 |
김구 선생이 경교장을 찾아온 조지 애시모어 피치 목사 부부 등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앞줄 오른쪽부터 피치 부부, 김구 선생, 이승만 전 대통령 배우자인 프란체스카 여사.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일제의 혹독한 탄압이 시작됐다. 중국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에서 도산 안창호가 체포됐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이던 백범 김구에겐 당시 돈 60만 원의 현상금이 걸렸다. 김구는 일단 미국인 목사인 조지 애시모어 피치의 집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일제 감시망이 좁혀오면서 상하이 탈출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김구는 임정 일행들과 함께 서양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피치 목사의 도움을 받아 얼굴에 화장을 했다. 피치 부부는 일행이 상하이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자동차를 운전해 기차역까지 실어날랐다. 훗날 김구는 ‘백범 일지’에 “피치 댁에서 20여 일간 숨어 지내며 비밀리에 활동했다”며 “(탈출 당시) 부인은 자동차에서 나와 부부인 양 나란히 앉았고, 피치 선생은 운전사가 돼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갔다”고 기록했다. 임정 요인의 피신을 도운 ‘파란 눈’의 제럴딘 피치 여사가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는다고 13일 국가보훈부가 밝혔다. 남편인 피치 목사는 같은 공적을 인정받아 지난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서훈됐다. 외국인 부부가 함께 독립장을 받은 첫 번째 사례다.
피치 여사는 1964년 남편과 함께 발간한 회고록에서 백범의 탈출을 도운 기억에 대해 “한국인과 미국인 모두에게 우리의 역할은 생명을 구하는 것, 협력하는 것, 만인에게 평화와 자유와 독립을 가져다주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국적을 뛰어넘은 연대와 우정은 ‘백범일지’에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김구는 “(피치 부부 집에 피신해 있던) 어느 날 피치 부인이 급히 2층으로 올라와서 ‘우리 집이 정탐꾼에게 발각된 모양이니 속히 떠나셔야겠어요’라고 알려주고 곧 아래층으로 내려가 전화로 남편을 불렀다”고 회상했다. 독립운동사 연구 권위자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저서 ‘백범의 길’에서 “한국 독립운동에는 단순히 한국인들만의 반일(反日) 투쟁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중국인은 물론 미국인 등 서양인들과도 함께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존재했다”고 기술했다. 도 교수에 따르면 피치 목사가 운전한 자동차 뒷자리에 백범과 피치 여사가 나란히 앉은 것은 “가족 소풍을 가는 듯한 태평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차량은 화이하이중로(淮海中路)와 바오칭로(寶慶路)를 거쳐 헝산로(衡山路)로 향했다. 헝산로를 벗어난 일행은 쉬자후이(徐家匯) 개천을 따라서 난 길로 동쪽으로 가다가 인도교에서 내렸다. 이후 철도 교통의 요지인 신룽화역(新龍華站)에서 기차를 타고 자싱(嘉興)으로 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의 집무실 겸 숙소였던 경교장의 모습.
피치 여사는 미국 미시간주 출생으로 앨비언대학을 졸업하고 감리교 선교사로 중국에 파견됐다. 1924년 결혼 이후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선교 활동을 했다. 백범이 작성해 발표한 ‘훙커우(虹口) 공원 투척 사건의 진상’을 번역한 이도 피치 여사였다. 백범 일행의 상하이 탈출 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피치 여사는 1940년대 한국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고, 한미협회 뉴욕지부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보훈부는 “피치 부부는 일제로부터 체포될 위기에 놓인 김구 선생을 백인으로 변장하게 하는 등 임정 요인의 피신을 도와 임시정부가 존속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부부로서 재미 한인사회 결집과 조국독립에 헌신한 황사선·김옥석 선생도 이번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황사선 선생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1913년부터 해방 때까지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표원과 부회장,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Copyright ⓒ 문화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