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에 다시 생각하는 백범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서릿발 같은 기개와 스스로에게나 주위 사람들에게나 늘 엄격한 태도를 떠올리게 된다.
목숨 내걸고 늘 백척간두에 선 삶을 살아야 했으니 그런 면이 부각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백범 김구 선생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백범을 불굴의 의지로 일제에 맞선 투사의 이미지로만 기억하기 쉽다.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백범은 아이들과 마주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아이들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볼도 쥐면서 ‘요놈, 요놈’ 하며 무던히도 귀여워했다. 볼을 꽉 쥘 때도 있었는지 백범이 나타나면 ‘저기 오신다, 아이구!’ 하며 달아나기도 했다는 것이, 당시 나이가 어렸던 여성 광복군 김효숙 여사(2003년 88세로 작고)의 회고다.
광복 이후 환국한 뒤 백범이 머문 경교장 앞뜰에는 주변 동네 아이들이 들어와 놀 때가 많았다. 경교장 관리인은 그런 아이들을 내쫓곤 했는데 어느 날 백범은 아이들을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한 아이에게 ‘幸福’(행복)이라는 휘호를 써서 주며 말했다. ‘너희들이 컸을 때는 우리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백범은 조국의 밝은 미래를 꿈꾸었을 법하다.
사실 백범이 바라던 삶은 교육자로서의 삶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백범은 명성황후 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을 살해해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 감옥에 투옥됐다가 1898년 탈옥하여 잠시 승려 생활을 했다.
이후 환속하여 1900년 강화도에 은신해서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903년부터 1911년 체포되기 전까지 백범은 황해도 일대에서 교육에 매진했다.
장련읍에 봉양학교를 열어 가르쳤고 장련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재직했으며, 장련에 광진학교를 세우고 종산의 서명의숙과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가르쳤다. 1908년 이후에는 해서 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 일하고 재령 보강학교 교장으로도 일했으니, 교육행정가 로서의 역량도 발휘했다.
역사는 가정을 허락하지 않지만 백범이 상하이로 망명하지 않았다면, 민족 교육사업을 계속 펼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백범의 유명한 ‘나의 소원’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마지막 부분이 있다.
백범은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사모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고 말하고,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는 말로 ‘나의 소원’을 마치고 있다.
우리는 교육자로서의 백범을 보다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백범 뿐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어느 한 가지 면모만 부각되어 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여러 각도에서 종합적으로 접근하고 재발견하려는 노력을 서둘러야 하지 않겠는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고 애국계몽가였으며 나아가 봉건국가와 사회주의 민주주의가 혼란스러웠던 시대상황에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고민했던 철학자로서의 백범을 8월에 다시 생각하는 뜻이 여기에 있다.
기고자 ; 김구재단 이사장 김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