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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만든 광복군, 어떤 군대였을까 - 중앙일보 2016.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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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admin | 작성일 | 2016-11-23 |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만든 광복군, 어떤 군대였을까 2016.11.14 중앙일보
얼마 전부터 신문이나 TV뉴스를 보는 어른들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시사에 관심이 있는 소중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겠죠. 나라가 위기에 처한 적은 예전에도 많았지만 조상들은 힘을 모아 난관을 극복하려 했죠. 오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희생정신을 기리는 법정기념일로,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제정했어요. 그 다음 해, 대한민국 육군의 바탕이 된 ‘한국광복군’이 창설됩니다. 비밀 작전을 준비하고 있던 이들은 1945년 갑작스런 해방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요. 수십 년 동안 역사가 기록하지 못했던 광복군의 행적을 소중이 추적해 봤습니다.
▲ 1940년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11월의 기념일에 대해 물으면 대부분 ‘빼빼로데이’를 말합니다. 하지만 11월은 순국선열의 날이 있는 달입니다. 현충일은 잘 알고 있지만 순국선열의 날은 조금 생소할 수도 있겠네요. 현충일과의 차이점은 일제강점기 당시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분을 기린다는 것입니다. 임시정부요원 6인의 제안에 따라 을사늑약(1905년)이 체결된 날인 11월 17일을 매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제정한 데에서 유래했죠. 조국 광복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넋을 기리고, 독립전쟁을 더 활발하게 추진하자는 의미에서 시작됐습니다.
▲ 1940년 중국 충칭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창설기념식(사진에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 직후 열린 오찬장에서 축사를 하는 백범 김구 선생.
광복군은 1940년 중국에서 창설됐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로, 사실상 대한민국 육군의 시작과도 같은 조직이었어요. 이전까지는 여러 독립군이 해외에서 활발히 활약했죠. 1910년 이후 국내에서 무력 항쟁을 하기 힘들어지자 국외에서 세력을 조직해 항일 무장투쟁을 하던 군대를 통틀어 독립군이라 불러요. 우리가 잘 아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 지청천 장군의 서로군정서군,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등이 모두 독립군인 셈이죠. 1930년대 말까지 독립군의 활동이 이어지다가 광복군이 탄생하면서부터 대부분 이에 흡수됐습니다.
일제의 눈을 피해 활동하던 5년이라는 시간이 짧았기 때문일까요. 전면전(교전 국가의 자원이 총동원 되는 무력 분쟁)과 같은 대규모 전투 활약도 찾기 힘들었고 일부 훈련에 대한 묘사 정도가 있을 뿐 이 기간 동안 남겨진 기록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는 알 수 있었습니다. 성공했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교과서에 짧게 기록된 ‘국내 진공 작전’에 대한 것이었죠.
1930년대 우리나라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횡포는 극에 달해 있었고 중국 상하이와 항저우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자금 사정이 나빠 어려움을 겪고 있었죠.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깜짝 놀란 일본은 임시정부에 대한 추적을 강화했고, 당시 임시 정부를 이끌던 김구 선생님은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중국 이곳저곳에 흩어져 무장 투쟁을 하던 독립군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것이죠. 중국의 도움을 받아 한인청년을 군사간부로 양성하는데 주력하고,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뤼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데 성공합니다. 미국에 사는 교포들에겐 자금 지원을 요청했죠.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의 임시수도 충칭(中慶)의 자링빈관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후 임시정부 김구(오른쪽) 주석과 지청천(池靑天, 가명 李靑天) 광복군 총사령관이 기념촬영한 모습. 그 결과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의 군사조직으로 한국광복군이 창설됩니다. 소대·중대·대대·연대·여단·사단 등 6단의 기본 편성이 이뤄지며 체계적인 구성을 갖췄죠. 총사령 지청천과 참모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총사령부가 있었고, 그 아래 3개의 지대가 편성됐습니다. 특히 간부들 중 상당수는 1920년까지 약 2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독립군에서 활약하도록 한 신흥무관학교 출신 인재들이었어요. 그동안 무장 독립운동을 하던 대부분의 인물과 세력이 광복군의 이름 아래 모였습니다.
광복군은 중국 각처에서 일제에 맞서 싸웠어요. 1941년 12월엔 광복군의 이름으로 일제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의용대의 김원봉은 부하들을 이끌고 광복군에 합류하면서 부사령관을 맡습니다. 1943년 8월에는 인도·미얀마 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해 1945년 7월까지 2년 동안 영국군과 함께 대일항전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활약으로 인해 수많은 청년들이 광복군에 자원 입대를 하기 시작했어요. 한국청년훈련반·한국광복군훈련반을 설치해 모집된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일정한 기간 동안 군사 훈련을 시켰죠. 당시 14살의 나이로 광복군에 입대해 활약했던 오희옥 지사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오 지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조국 해방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며 “여성들도 총을 들고 군사 훈련을 받으며 전투 임무에 투입될 정도로 광복군의 사기는 높았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광복군은 본격적으로 대규모 비밀 작전을 준비합니다. 김구 선생님은 광복군이 직접 국내로 진입한다는 대범한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초, 중국 주재 OSS(미국 육군정보전략본부)가 한인을 대일전에 활용하는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당시 광복군 제2지대장이었던 이범석이 미 제14항공군 사령관 셴놀트 소장을 찾아 광복군 요원들의 국내 침투를 제안했습니다. 미국은 이범석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이후 김구 선생님이 OSS 써전트 대위를 만나 합동작전 문제를 최종적으로 합의하는데 성공합니다. 일명 ‘독수리 작전’의 시작입니다. ▲ 참모장 이범석
▲ 독수리 작전을 위해 만난 김구와 미국 OSS 총책임자 도노반 소장.
▲ 함께 훈련한 OSS 교관들과 광복군 제2지대원들.
훈련은 광복군 제2지대와 제3지대를 대상으로 실시됐습니다. 매일 8시간 이상의 강도 높은 훈련이 이뤄졌어요. 광복군 제2지대의 훈련과정을 지켜본 미국은 작전수행에 매우 적합하다는 판단을 했고 군수·행정·통신·재정 장교 등 40명을 파견해 정보수집·암호해독·화기사용 등에 대한 훈련을 하도록 도왔습니다.
국내로 진입, 2단계는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 요원들이 낙하산과 선박 등을 이용해 침투한 후 미군의 상륙을 지원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주요 침투 지역은 동북부(나진·청진·웅기·무산), 서북부(신의주·다사도), 중북부(평양·흥남), 중남부(경성(서울)·인천), 동남부(부산·진해) 등 5대 전략거점이었습니다. 각 지역별로 일제의 해군기지·병참선·비행장을 비롯한 군사시설과 산업시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동시에 병력을 일으키는 단계까지 계획된 상태였습니다. 이 사실은 1급 기밀로 취급돼 한동안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야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 중인 문서가 공개됐습니다.
8월 4일 제2지대에서 교육을 받은 요원 1기생 38명이 훈련을 마쳤습니다. 본격적인 작전 수행을 눈앞에 두고 있었죠. 하지만 이때, 익히 아는 대로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습니다. 이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이뤄졌고 이어진 해방에 작전은 취소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준비한 것이 다 허사가 됐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광복군은 쓸쓸하게 배를 타고 귀국했어요. 당시를 회상한 오 지사는 “분위기는 매우 침통했고, 배를 타고 귀국한 직후에는 갖고 있던 총기류 등의 무장을 해제 당해야만 했다”며 “독수리 작전이 성공했더라면 자주독립을 이뤄, 남북으로 분단된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조국 해방을 위해 노력했던 광복군은 1946년 6월 해체됐고,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의 주요 간부로 참여해 명맥을 이어나갔습니다.
http://news.joins.com/article/208635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