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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백 투 더 동아/11월6일]상해서 돌아온 백범 선생母 동아일보 찾은 이유 - 동아일보 2017.11.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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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admin | 작성일 | 2017-12-21 |
어머니가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면, 그 아들은 자기뿐 아니라 어머니의 존재도 역사에 남긴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그렇고, 어머니 홍주 백씨와 아들 석봉 한호가 그렇다. 선생뿐 아니라 모든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어머니였다. 곽낙원 여사 사진. 동아일보DB
황해 장연군에서 태어난 곽 여사는 1922년부터 아들 내외와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살았다. 그러다 1924년 며느리 최준례 여사가 숨을 거두자 우유를 먹이고 빈 젖을 물려가며 손자 둘을 키웠다. (이렇게 키운 둘째 손자 김신 선생은 1960년부터 3년간 공군참모총장을 지낸다.) ‘백범일지’에 이렇게 썼다. 마저도 상하이에서 키우기 힘들어 환국(還國)코자 하실 때, 어머님은 우리 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데기가 많을 것을 보고, 매일 저녁 밤 깊은 후 그런대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찬거리로 하기 위해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하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어머님께서는 네 살이 채 안된 신(信)이를 데리고 길을 떠나셨고, 나는 … 어머님께서 담아두신 우거지 김치를 오래 두고 먹었다.” 백범일지 표지 사진. 돌베개 제공 기는 불가능했다. 백범일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떨어졌다. 떠나실 때 내가 그런 말씀을 드린 바 없건만, 어머님은 인천 동아일보 지국에 가서 사정 을 말씀하셨다. 지국에서는 신문에 난 상하이 소식을 보고 벌써 알았다면서 경성 갈 여비와 차표를 사서 드렸고, 경성에서 다시 동아일보사를 찾아가니 역시 사리원까지 보내드렸다고 했다.”
1925년 11월 6일자
“(곽 여사가) 근일에는 고국 생각이 간절하다고 그 아들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준비 중 이라는데 상하이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고국에는 가까운 친척도 한 사람 없는데 늙으신 이가 그대로 나아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만류하나 도무지 듣지 않고, 백골이나 고국강산에 묻히겠다고 하며 상하이를 떠나기로 작정하였다는데 아들의 만류함도 듣지 아니해 할 수가 없다 하며, 그 부인은 조선에 나간대도 갈 곳이 없으므로 그의 앞길이 매우 암담하다고 사람들은 매우 근심하는 중이라.” 당하자 다시 상하이로 건너와 ‘임정의 식모’를 자처했다.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아들의 소원은 물론 ‘대한 독립’이었다. 곽 여사는 처음에는 충칭(重慶)에 묻혔지만, 현재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곽 여사는 그렇게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동아일보와 백범 선생의 인연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 1940년 8월 10일 때 강제 폐간 당했던 동아일보가 1945년 12월 1일 중간(重刊)할 때도 백범 선생은 경세목탁(警世木鐸·‘세상을 깨우치는 목탁이 되어라’)이라는 붓글씨를 보내 이를 축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