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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김구, 그를 떠올리며 - 논객닷컴 2019.10.25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9-10-25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김구, 그를 떠올리며[2019 논객닷컴 청년칼럼공모전 수상작]

 

문예찬 | 승인 2019.10.25 09:00

 

 

 

[논객닷컴=문예찬] 크고 동그란 안경, 큰 코에, 결코 잘생겼다고 할 수 없는 울퉁불퉁한 얼굴, 그 시대 사람답지 않은 190에 육박하는 큰 키, 정치인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어눌하고 느릿느릿한 말투를 가진 사람.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이다.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다 보면 수많은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몽, 선덕여왕, 왕건, 이성계, 조광조 등등. 이들의 이름을 말할 때 나는 가급적이면 호칭을 붙이거나 호()로 부르는 것을 피한다. 학생들에게 어렵게 느껴지기도 할 뿐더러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것이 역사를 객관적으로 가르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러나 김구, 그 이름을 부를 때는 반드시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 밖에 없다. 그의 행적을 공부할 때나 그를 생각할 때면 나는 한없는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끼곤 한다. 강북 삼성병원의 으리으리한 건물들에 둘러 쌓여 초라하게 서 있는 경교장을 바라볼 때도,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이 묻힌 효창 공원 옆에,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를 엄청난 크기의 효창공원 운동장을 바라 볼 때도 나는 그를 생각하면 끊임없이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1946년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이 경남 진해를 방문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국가기록원

 

 

그는 흔들리지 않는 큰 바위와 같은 사람이었다.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고 일본인 장교를 살해하여 감옥 생활을 할 때도, 모두가 떠나간 임시정부를 홀로 이끌어 나갈 때도, 분단으로 치닫는 남북한을 바라보며 38선을 깔고 죽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원칙과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원칙과 소신은 민족의 완전한 독립과 자유였다. 나는 그의 원칙과 소신을 확인할 때 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70년이 지났음에도 그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살아가는 후손으로서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을 느낀다.

 

백범 김구 선생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역시 ''백범일지''일 것이다. 그 백범일지 중에서도 나의 소원은 그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백미중의 백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소원에서 ‘만일 하느님이 나에게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으로 시작해 그가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라고 말하는 부분만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그의 사상은 그 뒷부분부터 나타난다.

 

백범 김구 선생은 민족지도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정치가였다. 정치가에게는 그의 정치활동을 이끌어가는 정치사상이 존재한다. 과연 김구선생의 정치사상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민족? 국가? 독립? 놀랍게도 김구 선생은 <나의 소원>에서 자신의 핵심정치 사상을 ''자유''라고 밝히고 있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중략)자유란 무엇인가...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나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 개인, 또는 일 계급에서 나온다. (백범일지 나의소원)

 

김구가 생각하는 ‘자유’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와 그리 다르지 않다. 자유의 근본은 국가를 구성하는 각 개인의 의사에 있고, 이 개인의 의사결정에 따라 국가의 통치 규범이자 질서의 근간인 법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김구선생은 한 번도 자유로운 국가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조선시대였으며,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도 자유라는 것은 서양의 다른 나라들에게서나 가능한 너무 먼 이상이었다. 그런 그가 자유에 대해 이렇게까지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많은 공부를 했고, 많은 사상적 고민을 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김구는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동시에 독재정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되도록 조심하라고.(백범일지 나의 소원 중)

 

안타깝게도 그의 염려는 그가 죽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현실화 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비롯한 김씨 일가가, 남한에서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치가 등장해 국민들을 핍박하고,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일찍이 김구 선생은 이를 예견이나 한 듯 독재정치를 막기 위해 국민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지만 역사의 흐름은 그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강조한 또 하나의 중요한 가치는 바로 문화이다. 김구 선생은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에서만 문화가 꽃 피울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거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백범일지 나의 소원 중)

 

이렇게 본다면 김구 선생이 왜 독립운동을 하였고, 미국이나 소련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분단에 적극 저항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개인과 민족의 자유를 억압하는 그 어떠한 것에도 반대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상을 현실화 해보지도 못한 채 결국 안두희의 흉탄에 의해 한 많고 고단한 삶을 마감했다. 그가 꿈 꾸던 나라는 이제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가 되었다. 올해는 임시정부가 수립 된지 100년이 지난 해이다. 과연 오늘의 우리 사회는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자유로운 사회인지 늘 반성하고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가졌던 꿈과 이상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문예찬  yechan0226@naver.com

출처 :

http://www.nongaek.com/news/articleView.html?idxno=61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