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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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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admin | 작성일 | 2020-03-17 |
김문 작가l승인2020.03.13l수정2020.03.13 11:14
일본인 군인 때려눕힌 치하포 사건 [김문 작가]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일본인 군인 때려눕힌 치하포 사건
-혼자 떠났습니까.
“안 진사 댁 사랑에 머물고 있던 참빗장수 김형진과 같이 길동무를 하기로 했으나 본가에 가는 바람에 나 혼자서 집에서 부리던 말 한 필을 팔아서 200냥의 여비를 준비하여 청나라 금주에 있는 서옥생의 집으로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평양에 도착하니 관찰사 이하 전부가 단발을 하고 길목을 막고 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들고 머리를 깎고 있었습니다. 단발령을 피하려고 시골로나 산골로 들어가는 백성을이 많았습니다. 원성이 클 수밖에 없었지요. 평안도 북서쪽에 있는 안주(安州)에 도착하니 게시판에 단발정지령(斷髮停止令)이 붙어 있었습니다. 경성 종로에서 사람들에게 단발을 시켰다가 대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일본 가옥을 때려부수고 다수의 일본인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 무렵 고종은 정동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겼고 친러파 정권이 수립되면서 단발령 조치가 철폐되고 의병해산조칙이 발표됐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정세를 보고 청국으로 가는 것보다 정세를 관망하기로 하고 발길을 되돌려 용간을 거쳐 안악으로 가던 도중 대동강 하류의 치하포를 건너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치하포 사건이 생기지요.
“1896년 2월입니다. 내 나이 21살 때였지요. 2월 하순경이라 치하포에는 많은 얼음덩어리들이 떠내려 왔는데 나를 비롯한 15명을 태운 나룻배가 얼음덩어리에 걸려 오도 가도 못했습니다. 나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다들 침착하게 힘을 합하자고 했습니다. 큰 빙산에 올라 작은 빙산을 밀어내어 간신히 길을 열어 치하포에서 5리정도 내려간 지점에 당동했습니다.”
김삼웅씨의 ‘백범 김구 평전’에 치하포와 관련해 이런 내용이 나온다.
흔히 ‘치하포 사건’으로 불리는 일본인 스치다 살해사건은 백범의 생애와 사상에 큰 전기를 가져다주었다. 빙산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새벽길을 걸러 주막에 도착하니 풍랑에 뱃길이 막힌 길손들이 머물고 있었다. 그 중 수상한 사람이 창수의 눈에 띄었다. 말씨는 장연 사투리가 아니고 서울말이었으며 조선말에는 능숙하였지만 창수가 보기에는 분명 왜놈이었다. 더 자세히 살펴보니 두루마기 밑으로 군도(軍刀) 집이 보였다. 가는 길을 물으니 진남포로 간다고 하였다. 창수는 ‘보통 장사꾼이나 기술자 같으면 굳이 조선사람으로 위장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그렇다면 혹시 국모를 시해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아닐까. 미우라가 아니더라도 미우라의 공범일 것 같다. 여하튼 칼을 차고 숨어 있다는 것, 왜인이 우리나라의 독버섯일 것은 분명한 사실, 저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치욕을 씻어 보겠다.’고 결심했다. 마침내 백범의 생애에 가장 드라마틱한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왜인의 종자인 듯한 아이가 밥값을 계산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이놈!”하고 크게 호령하여 그 왜놈을 발길로 차서 계단 밑으로 떨어뜨렸다. 놀란 사람들이 일제히 방문을 열고 내다보거나 몰려오고 있었다. 창수는 이들을 향해 “누구든 이 왜놈을 위해 감히 나에게 범접하는 놈은 모조리 죽일 터이니 그리 알라.”하고 소리지르며 그 왜놈의 목을 눌렀다. 왜놈은 어느새 칼을 뽑아 휘둘렀다. 창수는 칼을 피하면서 발길로 왜놈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칼 잡은 손목을 힘껏 밟으니 칼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창수는 땅에 떨어진 칼을 집어 왜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도질했다. 손으로 왜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 호통을 쳤다.(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아까 왜놈을 위해 나에게 달려들려고 한 사람이 누구냐?” 창수는 벌벌 떨며 용서를 구하는 길손들을 용서하고 주막 주인에게 왜인이 타고온 배애서 그 자의 소지품을 갖고 오도록 명령했다. 소지품을 조사해보니 죽은 왜인은 스치다란 자로서 일본인 육군 중위였다. 가진 돈이 엽전 800냥 남짓되어 주막 주인에게 그 돈으로 배삯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동네 극빈한 집에 나눠주도록 하였다.
규장각 자료에는 창수가 75냥으로 타고 갈 당나귀를 구입하고 나머지 800냥은 동민에게 나눠주라고 주인에게 맡긴 것으로 돼 있다. 이 800냥은 나중에 일본 경찰에 의해 거의 전액 회수됐다.(다음편에 계속...)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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