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홍보 게시판입니다.
제목 |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 ||
---|---|---|---|
작성자 | admin | 작성일 | 2020-04-08 |
상하이 임시정부 활동 [김문 작가]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처음에는 순사의 자격에도 못미치는 내가 경무국장이 된 것에 대해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했지요. 그러나 국무회의에서 백범은 여러 해 감옥살이를 하여 왜놈 사정을 잘 알고 혁명시기는 인재의 정신을 보아서 등용한다며 이미 임명된 것이니 사양말고 공무를 집행하라고 강권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5년동안 경무국장으로서 신문관, 검사, 판사뿐만 아니라 형집행까지 담당했지요. 경무국의 주요 임무는 왜적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하여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입하는가를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정보과 사복 경호원 20여명을 임명하여 이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때부터 임시정부 일에 깊숙이 관여된 것이군요.
“그렇게 임시정부에서 첫발을 내딛은 것이지요.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와서 같이 살았고 둘째 아이도 낳게 됩니다. 그러다가 1923년 48살 때 내무총장으로 집무를 보게 됩니다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맡게 된 것이지요.”
김구는 임시정부에서 문지기를 자청했으나 노동총판, 내무총장, 국무령, 국무위원, 주석 등으로 중요 직책을 역임했다. 그렇게 된 것은 계속되는 임시정부의 인재난과 경제난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백범일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인가(人家)가 몰락하여, 그 고대광실이 걸인의 소굴이 된 것과 흡사한 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 시무할 때는 중국 인사는 물론이고 눈 프르고 코 큰 서양인 친구들도 더러는 임시정부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제 임시정부에 서양인이라고는 공무국의 불란서 경찰이 왜놈을 대동하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세금 독촉으로 오는 이 외에는 없었다. 상하이에서 서양 사람들 틈 속에 끼여 살지만 서양 친구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지만 크리스마스 등 14년 동안 연중행사로 몇백원어치 사서 선물한 것은 우리 임시정부가 존제한다는 흔적을 그들에게 인식시키려는 방법이었다.
백범은 또 나중에 독립운동자가 줄어든 이유에 대해 세가지로 들었다. 첫째는 임정의 국무차장 김희선, ‘독립신문’ 사장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같은 무리는 왜에게 항복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고, 둘째로는 국내 각도 각군에 조직하였던 연통제가 발각되어 많은 동지가 왜에게 잡혔고, 셋째로는 생활난으로 인하여 각각 흩어져 밥벌이를 하게 된 때문이라는 분석이었다.(‘백범일지’) (다음편에 계속...)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18 개정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