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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며느리 빈자리 채운 어머니 “우리 뼈 고향에 묻어다오”[동아플래시100] - 동아일보 2021-09-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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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admin | 작성일 | 2021-09-24 |
플래시백 때로는 사진 한 장이 긴 글보다 더 많은 사연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할머니와 손자가 나란히 찍은 이 사진이 그렇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11월 6일자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손자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할머니의 손은 그 어떤 보호막보다 안전하게 아이를 지켜줄 듯한 느낌을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할머니는 백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이고 아이는 김구의 큰아들, 그러니까 곽낙원의 맏손자인 김인입니다. 이 무렵 곽낙원은 큰 결단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아들이 있는 중국 상하이를 떠나 고향 황해도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었죠. 그것도 67세의 할머니가 두 살짜리 둘째 손자를 데리고 먼 길을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물론 주위에서도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왼쪽은 동아일보 1925년 11월 6일자 2면에 실린 곽낙원과 맏손자 김신의 사진. 오른쪽은 1936년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 사진이다. 앞줄은 엄항섭-연미당 부부의 자녀로 엄기순 엄기선 엄기동이고 가운뎃줄은 송병조 이동녕 김구 이시영 조성환. 뒷줄은 연미당 엄항섭 조완구 차리석 이숙진이다.
동아일보 기사는 곽낙원이 고국강산을 너무 그리워한다고 전했지만 속사정은 따로 있었습니다. 손자를 이대로 죽일 수 없다는 절박함이었죠. 1925년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변은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의 끔찍한 가난이 어른거리고 있었습니다. 청사 임차료를 못 내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굶는 날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죠. 교통국과 연통제가 일제 단속으로 무너져 국내 자금이 끊겼고 미국 하와이 등지 교포들이 내는 인구세도 제대로 오지 않았습니다. 교포 자금을 도맡아 쓰다시피 하던 이승만의 구미위원부가 해체명령을 받자 크게 반발한 여파가 컸죠. 곽낙원이 쓰레기통을 뒤져 건져낸 배추 껍데기로 찬거리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었습니다.
왼쪽은 1922년 김구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이던 시절 찍은 가족사진. 오른쪽이 아내 최준례이고 가운데는 큰아들 김인이다. 가운데 사진은 1924년 상하이 공동묘지에 묻힌 최준례의 묘비 주위에 모인 김구 가족. 왼쪽부터 둘째아들 김신, 김구, 곽낙원, 큰아들 김인이다. 묘비문은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두봉이 썼다. 오른쪽 사진은 1999년 최준례 유해를 서울 효창공원 김구 묘소로 옮겨 합장하는 모습.
왼쪽은 1934년 윤봉길 의거 직후 중국 상하이에서 찍은 김구 가족사진. 앞쪽에 앉아있는 사람이 곽낙원이고 뒷줄 왼쪽부터 김인 김구 김신이다. 오른쪽 사진은 1939년 곽낙원이 별세했을 때 묘지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신 김인 김구 김홍서.
왼쪽은 1939년 별세한 곽낙원 장례식에 모인 김구 가족. 왼쪽부터 김신 김인 김구. 김인은 해방을 5개월 앞둔 1945년 3월 충칭에서 숨졌다. 오른쪽 사진은 모친 곽낙원 묘비 앞에 선 김구.
기사 출처: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10924/109378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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