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법인 김구재단과 백범기념관에서는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한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의 의거일에 맞춰 매년 기념식을 갖고 있습니다.
올해로 79주년을 맞았습니다.
<상단 사진 1,2,3>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
“침략의 수괴를 처단하자.”
일본 왕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 이봉창
이봉창 선생은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왕(日王)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여 일인(日人)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전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큰 충격과 가능성을 안겨줬다.
이 선생이 터뜨린 한 발의 수류탄은 당시 침체일로에 있던 상하이 임시정부에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해 주었다.
<하단사진 1> 이봉창 의사(李奉昌, 1900. 8. 10~1932.10.10)
‘이 모든 수모와 설움은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
이봉창 의사(李奉昌, 1900. 8. 10~1932.10.10)는 1900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효녕대군(孝寧大君) 후손인 부친 이진규(李鎭奎)씨와 모친 밀양 손씨(密陽孫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취직했으나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았고, 만주로 옮겨 남만(南滿) 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견습을 했으나 역시 일본인 직원들로부터 “조센징”이라는 굴욕적인 수모와 설움을 받았다. 여기서 선생은 부모나 이웃 그리고 자신이 받은 민족적인 수모와 설움이 모두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선생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일은 피지배민족이 정복 민족의 수괴를 처단한 의거임을 깨닫게 됐다. 안 의사의 비장한 구국정신이 선생의 어린 가슴을 흥분하게 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상점 점원, 철공소 직공, 잡역부로 일본 생활을 익혀
이봉창은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남만에서 철도원 생활을 그만 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을 전전하며 일본어를 익히는 한편, 상점 점원이나 철공소 직공,잡역부,날품팔이 등으로 직업을 바꾸면서 일인 생활을 익혔다.
1931년 1월의 중국 상하이 날씨는 유난히 추웠다. 대륙을 휩쓸고 있던 반제국주의와 시민혁명의 열기도 식어가는 듯 했다.
국제정세도 그러했다. 제국주의자들의 횡포 앞에 피압박민족들은 자기 나라에서도 기를 펴고 살 수가 없었다. ‘거인(巨人)’ 중국이 그러할 때 이미 일제에 합병당한 조선은 말할 나위 없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 보창로 309호에 소재한 우리의 임시 정부는 당시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이라는 2가지 운동노선을 겨우 접목시켜 기틀을 잡았으나 뚜렷한 활로를 찾지 못하고 침체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열 조짐까지 나타나 독립운동은 생기와 역동성을 잃고 있었다.
<하단사진 2> 이봉창 한인애국단 선서문(1931).
이봉창이 1931년 12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작성한 선서문
1월 2일 상하이 임시정부의 이동녕(李東寧) 선생이 동료 국무원들과 함께 김구 선생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백범은 어찌하여 우리 한국인인지 일인인지 모르는 자를 임정 건물에 출입하도록 놔두고 있습니까?”
“…”
“그 자는 하오리를 입고 게다짝까지 신고 있지 않습니까?”
하오리는 일본식 남자 옷을 말한다.
백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검정색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창 밖의 바람이 잠시 가쁜 숨을 멈춘 사이, 백범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현재 그 젊은이를 조사하고 있으니 저에게 맡겨두시지요.”
임정 국무원 회의실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된 이 젊은이는 한국 태생의 일본인을 양부(養父)로 두고 일본인 행세를 하는 기노시타 쇼죠(木下昌藏)로 밝혀졌다. 일본에서 상하이로 건너올 때도 이 같은 일본식 이름을 썼다. 기노시타 쇼죠. 상하이 양수포(楊樹浦) 소재 일인 인쇄소 점원, 나이 31세. 봉급을 타면 술에 취해 사치와 호사를 즐기는 건달. 이것이 겉으로 드러난 이봉창 선생의 모습이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6년여의 ‘일본습득(日本習得)’을 마친 후 독립운동 본거지인 상하이로 옮겨왔다. 능숙한 일어를 바탕으로 일인상점에 취직해, 임시정부 청사와 상하이 대한인거류민단 출입의 기회를 잡는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이 기노시타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는 한국인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같은 사실이 백범에게 전해진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 만남 같기도 하고, 역사적 우연처럼 비치기도 한다. 백범은 임정 사무원인 김동우(金東宇)를 시켜 선생을 면밀히 관찰했다. 이봉창 선생이 단순히 ‘건달’이 아님을 간파한 백범은 여러 차례 비밀리에 면담을 갖는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백범의 투철한 애국심과 확고한 독립사상에 큰 감명을 받는다.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 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聖業)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안중근 의사 아우의 집에 가 수류탄 들고 맹세
거사 준비에는 꼬박 1년이 걸렸다. 백범이 자금과 수류탄을 준비하는 동안 선생은 일인 철공소에서 일하며 술과 음식으로 일경과도 교제를 하면서 속수무책인 건달 행세를 했다.
일제 영사관도 자유롭게 출입했다. 백범은 1931년 12월 13일 선생을 안중근 의사의 아우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으로 데려가 선서식을 거행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그런 후 수류탄을 양 손에 든 채 기념 촬영을 하였다.
<하단 사진 3> 이봉창 사진(1931).
일왕 히로히토의 저격을 태극기 앞에서 선서하는 이봉창 의사.
도쿄에서 궁성 돌아가던 일본 왕에게 폭탄 던져
일본인을 가장하고 12월17일 일본으로 건너간 선생은 이듬해 1월 8일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하이의 백범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암호 전보를 보냈다.
<하단 사진 4>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한 것에 대한 한국독립당의 선언(1932.01.10).
이날 거사를 치르겠다는 뜻이었다. 1932년 1월 8일. 선생은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말이 다치고, 궁내대신(宮內大臣)의 마차가 뒤집어 졌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선생의 장거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본 왕의 행차에, 그것도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폭탄을 던져 타격을 가하려 했던 일은 한국 독립 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것이었다.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전선에는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했다.
일본이 일으킨 이른바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야기된 한중 양국민의 감정 대립도 깨끗이 씻겨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350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일본 도쿄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선생은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당시 미혼이었으며 처자식이 없는 순국이었다. 광복 후 귀국한 백범은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서울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