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 8년간 피신.사분오열 위기 극복... 투쟁은 계속됐다
[임정90주년]승리의 역사를 가다
5. 1만5000리 역사투쟁(상)
기사입력 : 2009-11-26 10:07 [ 자싱, 항조우, 쩐장, 난징=맹창호 기자 ]
지면 게재일자 : 2009-04-03 면번호 : 13면
윤봉길의거 직후 상하이에는 대대적이 검거광풍이 몰아닥친다. 비교적 안전하던 프랑스 조계지도 더 이상은 피난처가 될 수 없었다. 일제는 상하이 전체에 비상경계망을 펴고 임시정부를 급습해 각종 문서를 강탈해갔다. 안창호 등 주요 독립운동가도 체포돼 불법 감금됐다.
체포된 동포와 애국지사들에게 임시정부는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지원에 나섰지만 더이상 상하이에 정부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김구는 그동안 베일에 가려있던 한인애국단의 실체를 로이터통신을 통해 세계에 공개하고 일제의 침략상을 만천하에 폭로한다. 그리고는 적의 예봉을 피해 항조우(杭州)로 임시정부를 전격 이전한다.
이로부터 1940년 9월 총칭(重慶)에 정착하기까지 임시정부는 상하이(上海)→항조우(抗州)→쩐장(鎭江)→창사(長沙)→광조우(廣州)→류조우(柳州)→치장(기강) 등 8년여 동안 한편으로 피신하며, 한편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이어간다. 1945년 11월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환국하기까지 고난의 시기를 보낸 임시정부는 일제의 추적을 피해 중국민과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고, 독립운동의 정치ㆍ군사적 이념기반을 다듬어갔다. 1만5000리 임시정부의 역사투쟁은 상하이탈출(1932년)→중일전쟁(1937년)→태평양전쟁(1942년) 등 주요시기마다 희망의 역사를 생산했다.
▲상하이탈출 항조우로
1차 상하이사변으로 중국침략의 야욕을 본격화한 일제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잇따른 의거로 발악적 상태의 보인다. 임시정부는 1차 상하이사변 이후 고민하더 창사이전을 결정한다. 극적으로 상하이를 탈출해 항조우로 옮긴 임시정부는 칭타이(靑泰)군영반점을 임시청사로 사용했다. 현재 이곳은 내부수리를 거쳐 현대식 호텔로 개조중인데 당시 임시정부 군무장 김철은 32호에 머물면서 개청문제를 처리했다.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항조우의 최대 관광지 시후(西湖)주변인 창성(長生)로 후비엔(湖邊)촌 23호 목조건물로 이동한다.
저장대 찐짼런(金健人)한국학연구소장은“윤봉길의거 이후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본거지를 항조우와 자싱지역으로 옮겼으며 추푸청을 비롯한 저장성 인민들의 지지를 받았다”며“그들은 자신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고 한국의 항일조직을 도왔다”고 말했다.
후비엔촌에는 항조우시가 조성한 임시정부기념관에 중국동포인 조성주(여)씨가 기념관장을 맡고 있다. 조 관장은“2002년 항조우 도시재개발 과정에서 임시정부 건물이 헐릴 뻔 했지만 외교부 승인을 받아 복원사업을 끝에 2007년12월30일 개관했다”며“연간 방문자가 5300여명에 불과해 더 많은 한국인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시정부에 이어 한국독립당도 1934년1월 항조우로 이전한다. 1930년 결성돼 상하이에 있었던 한국독립당은 항조우의 학사로 사흠방에 사무실을 열고 기관지‘진광’을 발행했다. 이곳은 후비엔촌 임시정부와 걸어서 5∼6분 거리인데 주변이 상업중심지로 재개발돼 언제 헐릴지 모르는 처지에 놓였다. 인근의 판교로 임시정부 요인숙소 역시 오는 11월 재개발로 철거될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항조우의 한국독립운동 유적은 상하이와 같이 기념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라지게 된다.
임시정부는 항조우로 이전했지만 1935년 최대위기에 봉착한다. 이 해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정당조직의 혼돈이 거듭된 시련의 해이기도 했다. 국무위원 사퇴와 일부 임시정부 관계자에 의해 국무위원 폭행사건까지 발생한다.
이같은 갈등의 배경에는 독립운동 자금운영과 관련이 많았다. 독립운동도 결국 조직사업으로 얼마나 많은 자금을 지원할 수 있느냐에 따라 운동의 헤게모니와 조직확대가 가능했다. 임시정부 초기 이동휘 국무총리가 레닌으로부터 지원된 독립운동자금 유용논란과 관련 사직했고, 이승만도 독립운동자금 횡령논란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자파지원 또는 세력확대 과정의 과욕에서 빚어진 일이었다.
▲선상회의로 기사회생된 임정
상하이를 탈출한 임시정부는 항조우에 있었지만 일제감시를 피해 임시의정원 회의를 자싱이나 난징등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이중 자싱은 김구의 피난처이기도 했지만 임시정부와 중국공산당에게는 선상회의로도 유명한 곳이다.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회의가 상하이 프랑스조계지(김구가족 거주지인 영경방과 근거리다)에서 열렸지만 급습 당하자 탈출한 대표자들이 자싱의 난후(南湖)에서 놀잇배를 타고 중국공산당 성립을 선언한다. 상하이를 탈출한 임시정부도 난후의 놀잇배에서 난상토론 끝에 김구 중심의 국무위원체재를 새롭게 정비할 수 있었다. 시기와 이유는 달랐지만 남의 눈을 피해야 했던 이들은 모두 놀잇배를 이용해 국운을 결정 짓는 회의를 난후에서 열었다.
상하이를 탈출할 임시정부는 수립기간 가운데 가장 빈약한 처지에 놓였다. 특히 임시정부는 항조우로 피신했지만 독립운동가들은 국민당 정부가 있던 난징으로 옮긴 경우가 많았다. 난징과 자싱, 항조우 등 각지로 독립운동가가 흩어져 가뜩이나 미약한 자체역량 마저도 줄었다.
이런 가운데 김구(군무위원)와 조소앙(외무위원)의 대립에서 시작돼 폭력사태까지 빚어진‘항조우 사건’은 국무위원 총사퇴라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는다. 이동녕과 김구는 국무위원을 사직하고 자싱으로 떠난다. 의정원은 더욱 혼란에 빠져 제24회 회의에서는 국무위원의 임기(1930년11월∼1933년까지)를 착각해 변칙개각(變則改閣)까지 단행됐다. 임시정부 주도의 독립운동은 다시 무기력에 빠진다.
여기에 보다 강력한 통일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2차회의에서 단일대당(單一大黨)을 제안하고 1935년 이를 민족혁명당으로 발전시킨다.
하지만, 여기에도 일부에서 제기된 임시정부 폐지론으로 분열이 시작된다. 임시정부 헌법개정도 결의됐지만 결국 임시정부 유지를 지지한 측과 대립각이 세워져 마지막에는 사분오열한다. 독립운동의 통일에 공감해 민족혁명당에 참여한 국무위원 양기탁, 김규식, 조소앙, 유동열, 최동오 등 5명이 각료를 사직함으로써 임시정부는 해체위기에 봉착했다. 임시정부에는 2명의 국무위원만 남게돼 국무회의조차 진행시킬 수 없었다.
김구는 이시영 등 항조우의 임시의정원 의원들과 회의를 거쳐 자싱의 난후에서 선상의회를 개최한다. 새로 이동녕, 조완구, 김구 등 3명이 국무위원에 선출하고 송병조와 차리석 등 2명을 보태 5명으로 간신히 무정부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해 11월 임시정부는 항조우보다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난징 인근의 쩐장으로 이동한다.
▲ 한국독립당 사무실로 추정되는 학사로 사흠방. 학사로 사흠방 34, 40, 41호는 일제의 기록에 의한 것으로 정확한 내용은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40호는 도시락업체로 이용되고 있지만 이도 재개발로 헐릴 예정이다.
▲강물위의 임시정부
1937년 일본은 베이징(北京)교외 마르코폴로 다리로 불리던 노구교를 침략해 중ㆍ일전쟁이 시작된다.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를 설치한다. 하지만, 전쟁은 점점 중국측에 불리하게 전개됐다. 제공권을 장악한 일본은 비행기로 수도인 난징을 연일 폭격했다.
난징에서 고물상으로 은신하던 김구는“잠결에 기관포소리에 놀라 방문 밖으로 나오자 벽력을 진동하며 천정이 무너져 침대를 덮쳤다. 각처의 불빛이 하늘로 치솟아 마치 붉은 담요와 같았다. 여기저기 시체가 형형색색으로 흩어져 있는데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백범일기에 적고 있다.
일본군은 치열한 전투끝에 이해 11월 난징을 점령했다. 이들은 난징에서 인류전쟁사에서 가장 야만적으로 30만의 중국인을 학살한다.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씨는‘장강일기(학민사)’에서“당시 난징학살의 지휘관 중 한국인 출신의 일본군 장교도 있었다”고 밝혔다.
중국정부가 내륙으로 후퇴함에 따라 임시정부도 중국군대를 따라 이동을 시작했다. 1937년 11월 찐장의 임시정부 요원들은 소관문서와 주요 물품을 휴대하고 선발대로 윤선을 타고 출발한다. 이어 자싱, 항조우, 상하이, 찐장 등에 난징으로 올 여비를 보내 100명의 임정요인 관계자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이들과 가족 등 300여명(제시의 일기)의 임시정부 대식구는 장강을 따라 풍랑을 헤치며 혹은 육로로 창사로 향했다. 임시정부는 강물을 따라 선상에서 업무를 봐야했지만 독립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본 시리즈는 김구재단(이사장 김호연)의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