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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7부 기획] 5-1. 인간 김구의 삶을 포기했던 독립투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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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admin | 작성일 | 2012-0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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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김구의 삶을 포기했던 독립투사 < 지면 게재일자 : 2009-04-03 면번호 : 13면 > [ 자싱=맹창호 기자 ]
중국어를 거의 못하는 김구는 자싱의 동문밖에서 중국인의 군사훈련을 살피다 보안대에 체포돼 곤욕을 치룬다. 추푸청의 아들 추펑장(楮鳳章)은 김구에게 신분보장을 위해 재혼을 강력히 권유한다. 상대는 상처한 중국인 교사였다.
이는 김구에게 곤혹스런 일이었다. 그는 1906년 31살에 최준례와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 뒤 가정보다는 감옥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둘째아들(김신)을 나은 최씨는 산후조리기간 상하이 피신처 2층 계단에서 구른데다 폐병까지 걸려 끝내 숨을 거뒀다. 8년전의 일이다.
당시 김구는 돈이 없어 아내를 치료하지 못했다. 선교사가 무료로 운영하는 병원에 간신히 입원시켰지만 면회한번 하지 못했다. 장례조차 동지들이 대신 치뤄야했다. 일제의 감시에 프랑스 조계지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재혼을 거절했다. 대신 자신의 신분이 탄로날 걱정이 적은 처녀뱃사공 주아이바오(朱愛寶)에게 몸을 의탁한다. 한낮에는 그녀의 배 안에서 지내고 밤이 돼서야 숙소로 돌아오는 고달픈 수배의 시기를 보냈다. 그의 방 창가엔 안전할땐 흰옷이 위험할땐 붉은 옷이 내걸렸다. 그들은 사통팔달의 호수와 운하를 무려 5년 간이나 표류해야 했다.
이후 김구는 난징으로 피신한 이후에도 주아이바오를 불러 회청교 부근에 방을 얻어 함께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일본이 난징을 침공해 급히 창사(長沙)로 떠난 김구는 그녀와의 갑작스런 이별을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남겼다.“남경을 떠날 때 데리고 있던 주애보를 고향인 자싱으로 돌려보냈다.
그후 종종 후회되는 것은 이별을 하면서 여비를 100원밖에 주지 못한 일이다. 근 5년동안 나를 위하였고 모르는 사이 부부 비슷하게 되었다. 나에 대한 공로가 없지 않은데 뒷날을 기약할 수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중략)”이라고 소회하고 있다.
혁명가이자 독립투사로, 그리고 감히 넘보지 못할 민족지도자인 그는 식민지가 되어버린 조국의 굴곡과 요철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안기 위해‘인간 김구’로의 삶을 그렇게 포기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