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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부 기획] 11-1. 中 국민당.임정 vs 공산당.조선의용군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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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민당.임정 vs 공산당.조선의용군 

 


 
기사입력 : 2009-11-26 10:07     [ 충칭,옌안=맹창호 기자 ] 

지면 게재일자 : 2009-05-22     면번호 : 13면 

 


 1932년 윤봉길의거 이후 상하이를 탈출한 임시정부는 일본에 쫓기는 처지였다. 국내와 연락이 제대로 닿지도 않았고, 현지동포가 많아 지원을 받을 형편도 아니었다. 미국 교포 일부가 자금을 보내왔지만 이마저도 피난길이 멀어지면서 제대로 전달되기 어려웠다. 결국 중국의 지원에 목멜 수밖에 없었고 이는 좌ㆍ우가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당시 독립운동은 중국정세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서안사변으로 2차 국공합작이 맺어진 1937년 충칭(重慶)에는 국민당 전시정부가, 옌안(延安)에는 장정을 마친 공산당이 자리를 잡는다. 충칭에는 국민당과 임시정부 및 광복군이 있었고, 옌안에는 공산당의 보호아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있었다. 독립운동을 지원한 양당은 전후 한국에 자신들과 우호적인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길 내심 바랐을 것이다. 이후 정부수립과 6.25전쟁에서 국민당은 남한을, 공산당은 북한을 지지하며 각자의 인연을 이어갔다.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는 김구와 임시정부를 전폭 지지했다.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들이 한반도를 제대로 인식조차 못할 당시 그는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고, 임시정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임시정부를 사실상 인정하면서도 국제관계상 단독처리가 어려웠던 중국은 정부 대 정부의 교섭 대신 국민당 또는 군사위원회를 창구로 사용했다. 

 



 
▲ 중국 국민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임시정부가 일제 패망 이후 1945년 11월 난징에 개설한 주중대사관 격인 주화대표단?? 아래 작은 사진은 대표단 일행. 

 

국민당은 일제의 패망 이후 임시정부가 환국해 민선을 거쳐 정식정부를 수립하도록 지원한다. 당시 임시정부는 중국에 ▲국제적 승인 ▲400만 교포처리 ▲일본군내 한국병사 선처 ▲환국에 필요한 경비를 요청해 우호적인 처리와 1억 원의 환국자금, 미화 20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지원받는다. 

 



임시정부는 환국에 앞서 1945년 11월 박찬익을 단장으로 주중대사관 격인 주화대표단을 조직한다. 주화대표단은 당시 국민당 정부가 있던 난징(南京)에 설치됐는데 지금도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는 개인이 거주하는데 다행히 난징지방정부가 역사건물로 지정해 외형과 주변을 단장했지만, 우리의 관심이 더욱 필요한 실정이다. 

 



반면 1940년 조선의용대는 본부가 중경으로 이동할 당시 상당수 대원이 뤄양(洛陽)을 향한다. 이들은 1941년 황하를 건너 태항산으로 이동해 화북지대를 결성해 팔로군의 지원을 받아 초모활동과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1943년 5월 편성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게 되자 중국공산당은 좌익 청년들이 주축인 조선의용군을 후일 한국통치의 인력으로 보고 보호했다. 이들은 전투지역인 태항산유격지에서 옌안(延安)으로 이동시킨다. 수백㎞ 황토고원으로 연결돼 비교적 안전한 옌안에서 그들은 각종 선무활동과 교육을 받게된다. 

 



당시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받은 조선의용대(군)와 가족들은 최대 5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 가운데는 무정처럼 오래전부터 중국공산당에서 활약한 10여명과 최창익 등 국내공산주의자 그룹 20여명, 조선의용대 출신, 새롭게 징모한 청년과 가족들을 합해 200명 정도가 연안에 있었다. 산둥과 동북 등 전지공작대로 나머지 300명이 활동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일본의 패망 이후 중국에 남았지만 상당수는 북한정권에 참여해 연안파를 이뤘다. 이들은 1945년 9월 15일 팔로군의 동북정진 계획에 따라 연안을 떠나게 된다. 

한국과 중국은 일제의 패망 이후 똑같이 분단의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한국의 남과 북, 중국의 충칭과 옌안으로 대표되는 양국의 4자 관계는 1992년 한·중수교까지 40여년의 세월이 이어졌다. 

 

충칭,옌안=맹창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