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1876.8.29~1949.6.26) 존영
백범 김구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했지만 늘 배움에 힘썼고, 1893년 동학에 입도해서는 팔봉접주에 임명되었고, 황해도에서 농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피신하면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선생을 만나 유학과 의리의 세계관과 판단, 실행, 계속의 단계로 일을 성취해야 한다는 실천철학을 배우고, 만주지역을 시찰하다 의병활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1896년에는 치하포에서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일본 육군중위 스치다(土田讓亮)를 처단하고, 인천감리서에 투옥되었다. 백범은 옥중에서 신서적들을 읽고 개화사상을 키웠으며, 탈옥 후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899년 환속한 후에는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신교육운동을,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비밀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하다가, 1911년 안악사건, 105인사건 등으로 수감되었다.
1915년 출옥한 후에는 동산평농장의 농감생활을 하며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백범은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임시정부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도 임시정부를 지키고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의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일으켜 내외(內外)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일제의 집요한 추격을 피해 피신생활을 하면서, 한인청년들을 중국군관학교에 입학시켜 군사훈련을 받게 하는 등 다가올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한 임시정부 주석(主席)으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이루었고, 연합국으로부터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는 등 항일운동의 최선봉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1945년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백범은 민족 스스로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에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 소위원회의 결의에 반대하며, 남북한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의하고, 평양에서 남북조선제정당 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이후 김구는 민족통일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다가, 1949년 6월 26일 통일운동을 저해하려던 친일?반통일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