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남북한에 두개의 정부가 수립되자, 분단과 이에 의한 동족상잔을 예상한 백범 김구 선생은 조국통일의 의지를 다졌다.1949년 1월 신년사에서 "우리 3천만 절대다수의 유일한 염원은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뿐"이라 밝히며 통일의 염원을 재확인하였고, 자주적 민족정신에 입각한 통일국가 건설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가 쏜 흉탄에 맞아 조국통일의 염원을 간직한 채 서거하였다.
서거 후 40여년 만에 이루어진 국회 조사활동에서 김구 암살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 수뇌부에서 면밀하게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차원의 범죄였음이 1995년 국회에서 채택된 <백범김구암살진상조사보고서>에서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