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김구재단은 선생님의 교육관을 본받아 바른철학을 가진 우수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제목 | [제7편] 고난의 임정 27년-27년간의 사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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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admin | 작성일 | 2012-07-12 |
[제7편] 고난의 임정 27년-27년간의 사투 (2011 7.27 뉴스데스크, 7.28 뉴스투데이)
◀ANC▶ 대전MBC 특별기획 "백범,애국을 말하다" 순섭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대륙에서 1945년 광복때까지 갖은 고난 속에 독립투쟁을 계속했는데요. 임시정부,고난의 27년을 중국 현지에서 고병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END▶
중국 저장성 자싱시의 한 주택, 1932년 홍구공원 의거 뒤 백범 김구 선생이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고 피신한 곳입니다. 선생이 머물던 2층 방에는 사방에 창문이 있어,일본 경찰의 접근을 수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사다리를 타고 1층 복도로 내려갈 수 있게 비상통로도 만들어 놨습니다.
◀INT▶성 방/ 매만처 관리 책임자 "이 비밀통로는 침대밑에 있었는데 위험할 때는 이곳으로 피했어요"
건물 밖에는 한 척의 배를 대기시켜 수시로 호숫가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INT▶ "위기의 상황일 때 김구 선생님은 낮에는 배에서 주애보 사공이 김구 선생님을 모시고 호수에서 머물렀어요.밤이 되어서 안전할 때면 집으로 돌아가셨지요"
◀ 이펙트 ▶ 일제 추적을 피할수 있다면 깊은 산골짜기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저장성 하이옌현의 이 별장에도 외롭고 힘들었을 김구 선생의 도피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INT▶ 왕단평/하이옌현 남북호 재청별청 관리자 "길을 산책하고 있을 때 적에게 발각되어 이곳으로 도피한 지 6개월 뒤 또 다시 가흥으로 도피하게 되셨어요"
일제 감시가 심해지면서 임시정부는 중국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청사를 옮길 수 밖에 없었고, 급하게 마련하다보니 여관을 청사로 삼아야 했습니다. 아직도 여관 내부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머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다시 2층짜리 작은 다세대 주택으로 옮겼는 데, 이곳을 청사로 택한 이유만 봐도 도피생활의 고단함이 짙게 묻어납니다.
◀INT▶ 최 란/ 항저우 임시정부청사 안내팀 "좁은 공간에서 많은 식구들이 살다 보니까 (중국사람들이)서로가 잘 알려고 안 합니다 상대방을. 그러다 보니까 서로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피난의 여정을 그나마 쉽게 보내지 않으셨을까 생각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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