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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광복군 ‘국내 진공작전’ 앞두고 일본 항복…김구의 통탄 - 중앙일보 2019.01.18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9-01-24

충칭(重慶)에서 밤 기차를 타고 11시간을 달려 산시(西)성 시안(西安)에 도착했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탄생한 한국 광복군은 그해 11월 전방 작전에 편리한 시안에 총사령부를 설치했다.  

 

임정의 마지막 희망은 연합군의 합동작전(국내 진공작전)이었다. 그 작전을 추진했던 미국 육군 전략첩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훈련기지가 있던 곳이 시안이다. 정보 수집과 유격대 활동 임무를 수행한

OSS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으로 중국지부는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에 있었다.

 


첫 답사지로 한국광복군 사령부 옛터를 찾아갔다. 하지만 지금은 호텔이 들어섰고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다음

답사지는 한국광복군 제2 지대 본부 표지석 기념공원’이었다. 비각에는 ‘한국광복군 시안 제2 지대 본부 옛터

. 시안시가 2014 5월에 이 터에 중국 군인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한국 지사들을 기념해 기념비를

세웠다고 씌어 있었다. 이곳은 광복군 제2 지대 여군 반장이던 나의 시이모 이월봉(李月峰·1915~77) 애국지사의

활동무대 이기도 해서 개인적으로 각별한 곳이다. “광복군 제2 지대 본부에서 남자와 똑같은 군복을 입고 똑같은

훈련을 받았다”던 시이모님의 사진을 들고 당시 모습을 잠시 상상해 봤다. 광복군에서 여성들도 당당하게 일익을

담당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광복군의 조직을 보면 백산(白山) 지청천(池靑天·1888~1957)이 총사령관,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1898~1958)

부사령관,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1900~72)이 참모장(나중에 제2 지대장)을 맡았다.

 

지청천 장군은 YMCA의 전신인 황성기독교청년회 토론회에서 “우리 청년에게 총을 달라”고 토로했을 만큼

혈기가 넘쳤다.191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중위로 임관했으나 3·1운동 소식을 듣고 일본군에서 탈출했다.

독립군 양성기관인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장이 된 그는 개교식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시다”라고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1920년 이후 줄곧

만주를 무대로 일본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지청천은 김구 선생과 연이 닿으면서 1940년 창설된

광복군에서 사령관을 맡는다.

 

 

이범석은 광복군 참모장과 제2 지대장을 맡았다. 경성고보(경기고의 전신) 재학 시절인 1915년 여름 독립운동에

참여할 청년을 물색 중이던 몽양 여운형(1886~1947)을 만나 중국 망명을 결심한다. 상하이에서 만난 신규식 선생의

주선으로 이범석은 1916년 쿤밍에 있던 윈난 육군 강무당(講武堂)에 진학해 기병과 수석으로 장교가 된다. 3·1운동

소식을 듣고 동기생 4명과 함께 상하이 임정을 찾아갔다. 이후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에 중대장으로 합류해 1920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광복 후 1948년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시안의 이범석 제2 지대장 관사 옛터는 신축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이웃에 사는 중국인은 “이전에 흙벽돌로 된

낡은 집이었는데 중·일 전쟁 때 한국 군인이 살았다는 말을 부친으로부터 들었다”고 전했다.  

 

이튿날 시안 남쪽의 중난산(終南山)을 답사했다. OSS 대원들이 무력을 통한 광복을 위해 추진한 국내

진공작전(독수리 작전, Eagle Project)의 낙하 훈련 장소를 찾는 게 목적이었다. 독수리 작전은 광복군이

1945 2월 미국워싱턴 OSS의 검토를 거쳐 미군의 중국 전구(戰區) 사령부에 보고됐다. 미군 클라이드

사전트(1909~81) 소령이 책임자로서1기 훈련대원 50명에게 3개월간 게릴라전법·낙하·도강술 등 특수훈련을 시켰다.

당시 미국 문서에는 광복군 제2 지대가 주둔하고 있던 작은 절에서 400m 떨어진 중난산 깊숙한 곳이라고

나온다 작은 절은 미퉈구쓰(?陀古寺)였다. 등산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니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 아찔하게

눈에 들어왔다.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려던 국내 진공작전은 8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잇따라 투하되면서

무산됐다. 일본은 8 10일 스위스에 있던 국제연맹(유엔의 전신) 본부에 포츠담 선언 수락의사를 전달했다.

제연맹은 연합국 측에 이 사실을 당일 바로 알렸다. 이날 저녁 중국군 측으로부터 일본의 항복 사실을 전해들은

김구와 광복군은 기뻐하기는커녕 크게 낙담했다. 당시의 복잡한 심경은 김구 주석의 회고에서 확인된다.

김구는"일본의 항복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써서 참전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국제 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고 통탄했다. 당당한 전승국이 되기

위해 이제나저제나 출동명령만 손꼽아 기다리던 광복군의 심정도 김구 주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광복은 임정과

광복군의 무장투쟁이 밑바탕이 됐지만, 미군의 원자폭탄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범석 장군이 지휘하는 광복군 국내 정진대(挺進隊) 선발대는 일본 항복 예비접수대 역할을 하려고 국내로 가기

위해 8 15일 오후 4시에 시안 비행장으로 향했다.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항복 선언 불과 4시간 뒤였다. 8 16

오전 4시에야 이륙한 C-47 수송기에는 이범석 장군, 김준엽(金俊燁·1920~2011), 장준하(張俊河·1918~75),

노능서(魯能瑞·1923~2014) 4명만 탑승했다.

김준엽은 1944년 학도병으로 중국 주둔 일본군에 투입됐으나 탈영했다. 학도병 장준하도 징집 6개월 만에 쉬저우에서

탈영해 두 사람은 수천 리를 걸어 충칭 임정을 찾아가 광복군이 됐다.

 


그런데 광복군 4명이 탄 수송기가 산둥(山東)반도 상공을 지날 때 쿤밍으로부터 갑자기 “한국 진입 중지”라는

무전을 받고 시안으로 회항했다. 패망한 일본의 기습 공격을 우려한 조치였으나 광복군은 또 한 번 분루를 삼켜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광복군 4명을 포함해 22명이 탄 C-46 수송기는 8 18일 오후 3시에 여의도 땅을 밟았다.

나라를 잃은 지 35년 만의 귀환이었다.

 

임정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러시아 연해주에서 시작해 중국 상하이~항저우~충칭을 거쳐 시안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임정 100주년은 지금의 대한민국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임정은 27년간 오로지 조국 광복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매진했다. 특히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의 지지를 얻어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1943 11 27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독립 결의를 끌어낸 것도 큰 성과였다. 그러나 파벌 갈등과 내부 불화는 지금도 거울에 비춰

봐야 할 큰 오점이었다.

열강이 몰려오던 구한말에 왜 우리는 나라를 잃어야 했는지 임정 100주년을 자축하기에 앞서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임정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선열의 헌신 덕분에 나라를 되찾았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남

북이 분단됐고 여전히 4강에 둘러싸여 있다. 남남 간에도 이념·지역·세대·남녀 갈등이 겹쳐서 통합은커녕 분열하고 있다.
  
대장정을 마무리하면서 “독립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동시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도 줄곧 입가에 맴돌았다.

 

 

문영숙

1953년 충남 서산 출생.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 『독립운동가 최재형』 『카레이스키 끝없는 방랑』 『
글뤽아우프 독일로 간 광부』 등을 집필해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로 불린다. ‘문학동네 문학상’ 등을 받았다.
최재형기념사업회에서 상임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233010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