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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디어파인 칼럼=이봉창, 윤봉길과의 만남 [김문 작가]
작성자 admin 작성일 2020-04-16

 김문 작가  승인 2020.04.14  수정 2020.04.14

 

 

이봉창, 윤봉길과의 만남 [김문 작가]

[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상하이에 있을 때 이봉창과 윤봉길을 만난 것으로 압니다.

 

내가 재무부장이자 민단장을 겸임할 때입니다. 하루는 중년의 동포가 민단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얘기를 하더군요. ‘저는 일본에서 노동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하고 싶어 상하이에 가정부(假廷府, 가짜 정부)가 있다고 하여 와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물어봤더니 보경리 4호로 가라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고 말하더군요. 그는 경성 용산 출신으로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고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맞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영원한 쾌락이라면 31년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해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하이에 왔습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1년쯤 지난 193112월 이봉창에게 여비와 폭탄 두 개를 주고 일본 천왕을 폭살하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이듬해 18일 신문에 ‘이봉창이 일본 천왕을 저격하였으나 명중하지 못하였다.’라는 제하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결국 죽이지는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윤봉길 의사가 찾아왔는데 동경 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거든 자기를 써달라고 했습니다. 원래부터 그가 성실한 항일투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429일 홍구공원에서 천장절(天長節, 일왕의 생일)을 맞아 축하식을 성대하게 거행된다는 것을 알고 임무를 주었지요.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점심 도시락과 물통을 휴대하라는 포고가 났는데 도시락에 폭탄을 미리 준비해두었지요.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그와 마지막 헤어지면서 ‘훗날 지하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날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결국 이봉창은 교수형으로, 윤봉길은 총살형으로 각각 순국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나는 현상금 20만원에서 60만원으로 불어났습니다. 이 금액은 일반 노동자 월급이 30원 안팎이던 시기였으니 누구나 잡기만 하면 일확천금을 거머쥐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숨겨주고 먹여줬던 생명의 은인인 피치 박사 부부는 평생 잊지 못합니다.”

 

-도피생활이 계속 이어지게 됩니까.

 

그렇지요. 현상금이 어머어마 하게 붙었으니 늘 정탐꾼이 따라다녔습니다. 윤봉길 의사 의거후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납니다. 그 때가 19325월이었지요. 프랑스 조계 당국이 ‘더 이상 보호해줄 수 없다’며 임시정부의 이전을 요구했습니다. 자싱과 항저우에 분산 이전했고 나도 이름을 바꿔가며 가흥, 난징, 창사 등을 거쳐 1939년 충칭으로 가게 됩니다. 가흥에서 지낼 때는 이름은 광동인 장진구(長震球)로 바꿨는데 가흥에 사는 처녀 뱃사공 주애보(朱愛寶)를 만나 신세를 지게 됩니다.” (다음편에 계속...)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
부덕민, 『백절불국의 김구』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2009)
·
김삼운, 『백범 김구 평전』 (시대의 창, 2004)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18 개정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