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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고난의 길을 밟아보다! - 정책브리핑 2016.8.13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6-08-17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고난의 길을 밟아보다!

[광복절 특집] 중국 대륙 떠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자취 순례기

정책브리핑 - 2016.8.13

 

영화 ‘역린’의 대사 중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나오고

겉에 배어나오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이 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일제강점기 이를 실천한 곳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다. 필자는 운이 좋게 상하이를 시작해 충칭까지

일주일간 임시정부가 갔던 길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제71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있어 더욱 뜻깊었다.

광저우, 류저우는 가보지 못했지만 상하이, 항저우, 창사, 치장, 충칭에서 보았던 임시정부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상하이)

 

먼저, 상하이 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상하이, 연해주, 한성에 세워졌던 임시정부들이 통합돼

만들어진 정부이다. 상하이로 통합됐던 이유는 당시 상하이가 활발한 국제도시였고,

조계지(개항장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여서 

일본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이동경로

 

 

임시정부가 세워질 당시는 이미 일본에 주권을 빼앗겼을 때였다. 더이상 ‘대한제국’은 없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백성,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된다는 의미에서 ‘대한민국’이라고 이름지었고,

정부의 3가지 요인인 국민, 주권, 국토 중 주권이 일본에 있었기에 ‘임시정부’라고 이름지었다.

그렇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상하이에 머물러 있을 당시에는 아무 기반도 없던 때라 임시정부는 먼저 헌법을 제정했다. 

현재에도 헌법 맨 앞 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라는 문장이 적혀있다. 

그 시초가 바로 상하이에서 시작된 것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상하이)

 

임시정부는 대통령제를 따랐다.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됐고, 그 밑에 국무총리, 내무부, 경무부 등의

부서를 두었다. 1920년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머물러있을 당시에는 자유주의, 공산주의 또는 무장 투쟁,

실력 양성 등 독립운동가들의 이념도 다양했다. 

때문에 독립운동의 중심이 흔들렸고, 임시정부 또한 흔들리게 된다. 이런 이유로 많은 요인들이 임시정부를 떠나갔고, 

그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헌법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헌법이 바뀌면서 대통령제-내각책임제-국무위원제-주석제로

정부 형태도 변했다.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졌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자리

 

1927년 김구 선생이 국무위원으로 취임하면서 임시정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노력 중 하나가

바로 한인애국단이다. 한인애국단원인 이봉창, 윤봉길 의사 덕분에 독립운동가들은 다시 하나로 모이게 된다.

상하이가 일본에 의해 점령되면서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이동하게 된다. 항저우에서 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개최하여 임시정부를 재정비했다. 특히 이 시기 절강성 주민들과 생활하면서 중국 국민당 정부와 우호를 맺게된다.

당시 중국 정부도 일본인들에 대한 반발이 컸기 때문이다.

 

중국 국민당 정부와 임시정부는 동아시아 국가와의 연대를 강조하며 국민당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임시정부의 이같은 활동들은 국외 동포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항저우)

 

이후 중국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남경이 일제에 의해 함락되면서 임시정부는 창사로 이동한다. 임시정부가 창사에

머무는 동안 3당운동을 진행한다. 3당운동이란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앞으로의 독립운동에 대해

3당의 통합에 대해 논의하던 것을 말한다.

3당회의는 조선혁명당의 본부였던 남목청에서 진행됐다. 회의 진행 중 3당합당에 반대하는 이운한의 저격으로 인해

현익철은 사망하였고, 김구, 유동열, 지청전이 큰 부상을 당했다. 이를 남목청 사건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항저우)

 

이후 임시정부는 광저우, 류저우, 치장으로 이동 후 충칭에 정착한다. 충칭은 임시정부가 본격적으로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시기이다. 임시정부는 이 때 한국 광복군을 창설했다.

또한 미국 특수부대 OSS와 연합해 독수리 작전(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한다.

 

이때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이 미군과의 작전회의를 주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작전 실행 전

일제는 항복하고 만다. 임시정부에 있어 독립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오랜 시간 공들인 작전들이

실행되지 못했으며, 타국에 의한 항복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충칭)

 

광복 후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남북한 통합 정부를 주장했지만, 결국 남북은 분단됐다.

지금도 남북은 분단 상태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며 조국을 사랑했고 조국에 헌신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정성과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분단된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정신을 기리며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한다면 우리의 영웅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통일된 조국 또한 어느새 눈 앞에 올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한정은 pano1215@naver.com? 

 

http://reporter.korea.kr/newsView.do?nid=148819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