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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학로 예술극장, 창작뮤지컬 백범 김구 제작 지원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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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천안에서 창작뮤지컬로 되살아나... 

- 백범 서거 60주기, 천안대학로예술극장 개관 4주년 기념작 

- 8월 14일부터 16일까지 4회 공연

 


대한민국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된 하나의 국가를 위해 일생을 바친 백범 김구 선생의 삶이 지역극단에 의해 창작뮤지컬로 제작돼 오는 14일 천안에서 첫 선을 보인다.

 


백범 서거 60주기와 천안대학로예술극장 개관 4주년을 맞아 제작된 창작뮤지컬 ‘백범 김구’는 천안대학로예술극장(류중렬 감독)과 재단법인 김구재단(이사장 김호연)이 공동 기획하고, 충청남도와 천안시가 후원해 만들어졌다.

 


창작뮤지컬 ‘백범 김구’는 최송림 작가의 대본과 왕준기 교수의 음악 그리고 류중렬 감독의 연출로 백범의 삶이 14장의 뮤지컬로 다시 태어난다. 

 



일제의 국모 시해로 인한 치하포 사건에서부터 감옥생활, 농촌계몽활동과 교육운동,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윤봉길 의사의 의거, 광복 후 신탁통치 반대, 그리고 통일된 하나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애쓰다 경교장에서 서거하기까지, 백범 선생의 삶이 웅장하고 힘찬 노래와 역동적인 춤꾼들의 동작에 의해 100분 동안 실감나게 그려진다.

 


이번 작품의 기획과 연출을 맡은 류중렬 감독은 “백범 김구 선생의 독립정신과 애국정신을 그리는 창작뮤지컬을 통해 관객들에게 국가와 민족의 의미를 되새기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화합과 통일대한민국의 해법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구재단의 김호연 이사장은 “백범 김구 선생의 삶은 분단된 오늘날 우리현실에서 진정한 광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지적하고, 교육과 문화를 바탕으로 ‘아름다운 문화국가’를 주창하셨던 백범 선생의 삶과 사상이 창작뮤지컬로 되살아나 더욱 의미가 크다”고 감회를 밝혔다. 

 



창작뮤지컬 ‘백범 김구’는 오는 8월 14일(금)부터 16일(일)까지 저녁 7시에 동남구청 앞에 위치한 천안대학로예술극장(동남구청 뒤 舊 브로드웨이극장)에서 상연된다.

 




[별첨자료] 1. 작품개요

[별첨자료] 2. 기획의도

[별첨자료] 3. 작품 줄거리

 


[별첨자료]1.작품개요

1. 작품개요

1) 공연명  뮤지컬 “백범-김 구”


 2) 주최.주관 : 능수버들 예술단, (재) 김구재단, 천안대학로예술극장,

3) 후원 : 천안시. 천안 연극협회 후원회

4) 공연일시 : 2009.8.14(금)~16(일)  평일: 7시 / 토: 4시, 7시 / 일: 7시 


    장소 : 천안대학로예술극장 (동남구청 뒤 버들육거리 舊 브로드웨이극장)
 

5) 공연 / 예매문의 : 문화장터(554-7569) 


 6) 출연배우 : 강승원, 이계준, 전인섭, 최창석 외

 



[별첨자료] 2. 기획의도


2. 기획 의도                


                                                                     “백범-김 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고자 하는 뮤지컬

★작의

2009년은 상해임시정부 수립 90주년과 주석 백범 서거60주년이 되는 해다. 청소년들에게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김구 선생이라는 대답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만큼 학생들은 물론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도 드물다. 흉탄에 쓰러진 그의 죽음이야말로 우리민족 분단의 아픔 그 자체가 아닐까?

아직도 조국은 남북으로 갈라진 채 통일의 길은 험난하다.   
이에 ‘삼팔선을 베고 죽더라도 민족의 분단을 막겠다’던 백범 김구의 숭고한 독립 애국정신을 그리는 추모창작뮤지컬을 무대에 올림으로서 민족화합과 통일에의 해법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백범-김 구”서거 60주년을 맞아 애국심을 다시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일제의 암울하던 시대에 온 몸을 바친 “김 구”선생님이야 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이다. 금년 서거 60주년 행사로 재단법인 김구 재단은 “백범 김 구”선생님의 작품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였으며, 천안대학로예술극장은 개관 4주년 기념작품행사로 일년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했습니다. 

 



★“백범-김 구”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실업난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사회의 분위기는 어둡고 먹구름이 드리운 듯 지금 우리들에겐 좀 더 희망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모티브가 필요하다. 그 것 중에 하나가 문화적 아우름이요 일제의 암울하던 시대에 온몸을 던져가며 조국의 광복과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데 일생을 바친 김구 선생님의 애국심이 아닐까 싶다.

 


★뮤지컬 “백범-김 구”

천안의 인구는 55만이다. 전국 10위권의 대도시요 발전하는 우수 도시이다. 성장속도가 어느 도시보다 빠른 역동적 도시며, 교통의 요지이자 산업의 메카이고 서해안 시대의 중추 도시인 것이다. 그러나 빠른 발전 속도와는 다르게 도시는 황폐해 가고 시민들은 까칠하며 점점 더 천안다운 면이 사라지고 있다. 어느 고장이나 발전을 한 만큼 부작용이 따르겠지만 특히 천안은 더욱 심각하다. 외형적인 발전이 우리의 마음을 황폐화 시키고 암울한 도시를 만들어 간다. 이러한 천안에서 예술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서함양에 큰 몫을 할 것이다. 인심 좋고 과격하지 않고 홍수와 가뭄이 없는 비옥한 천안의 참 모습이 살아날 것이며 천안의 모든 예술인들이 참여하며, 시민들과 함께 공감 할 수 있는 종합 에술의 참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진정한 우리 천안만의 새롭고 자랑스러운 장을 열게 될 것이다.

 


[별첨자료] 3. 작품 줄거리


3. 작품 줄거리

 


 객석의 불 꺼지면 전 출연자의 노래와 춤이 어우러져 화려한 막이 오른다. 코러스와 춤꾼들의 동작이 힘차고 경쾌하다. 요컨대 진취적이고 희망적인 분위기가 역동적으로 펼쳐진다.

 


 이후 안무가 필요한 춤과 작곡한 노래만 해도 열댓 개 안팎이다. 


 처음으로 무대 전환되면 항일선동죄로 1909년 10월 주재소(경찰서)에 끌려온 김구인데, 거기서 안중근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는 통쾌한 신문기사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어쩌면 막연했던 항일감정이 구체화 되어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김구는 신선한 흥분으로 뜨겁게 끓어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잠시 ‘정리되지 않았던 지난날의 애국심’을 뒤돌아본다. 

 


 하지만 따져보니 ‘정리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일찍이 어린 나이로 동학에 가담하여 ‘아기 접주’라는 말을 들으며 소년장수로서 의병에 가담한 일이라든가, 일본 낭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피살됐다는 비보에 ‘국모를 죽인 원수를 갚는다’고 왜놈을 난도질해 죽인 사건 등은 그의 나이 불과 스무 살 때의 일이다. 이런 저런 사건에 연루돼 어릴 때부터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호랑이 같은 기상으로 간수들과 당당히 맞설 뿐 아니라 재소자들을 무지(無知)에서 깨우쳐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펼치다가 기어이 탈옥을 감행한다.

 


 탈옥한 후에는 스님이 되어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충남 마곡사에서 암자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의 죽음에 환속하여 최준례와 결혼하고 교육자로서 변신(變身),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하고 환등회를 여는 등 농촌계몽과 항일운동을 활발하게 재개한다.

 


 그런 와중에 또 잡혀 들어온 그다. 이번에는 안중근의 아버지 안진사와 안의사 사촌 안명근과의 두터운 교분을 트집삼아 ‘하얼빈 안중근 사건’과 연결 하려고 공작을 부린다. 결국 김구는 일경들의 온갖 악랄한 고문에 굴하지 않고 조작을 분쇄,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17년 징역형을 선고 받는다. 

 


 다행히 수감생활 1여년 만에 일왕 메이지(明治)가 죽자 사면령이 내려 7년으로 감행된 데다 다음해 또 메이지의 처가 죽자 7년에서 5년으로 연달아 감형되는 바람에 곧 세상에 나갈 희망이 보인다. 김구는 이름자를 거북 구(龜)자에서 아홉 구(九)자로 고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지었다. ‘백’은 백정에서 따온 것이며 ‘범’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고 낮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1914년 7월 가출옥으로 3년 6개월 만에 석방되어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동산평이라는 농장의 농감(農監)으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농춘계몽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러던 차 기미년 3월 1일 독립만세사건이 터져 일제(日帝) 감시의 눈초리가 심해지자 새로운 각오의 불꽃을 지피며 더욱 더 큰 뜻을 품고 중국 상해로 건너간다. 

 



 “내게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하게 해주시오!”

 


 그런 마음으로 임시정부를 찾은 그인데 결국 안창호 등 동지들의 강권으로 경무국장을 거쳐 주석에 오른다. 이봉창, 윤봉길 등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김구의 지령으로 이봉창이 동경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져 실패하자, 다음엔 윤봉길이 스스로 나선다.

 


 윤봉길은 한인애국단 입단식을 갖고 김구 주석과 기념 회중시계를 교환한 후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리는 천장절(일왕 생일) 기념식장으로 가서 폭탄을 던져, 일본 침략자 앞잡이 주구들을 죽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쾌거를 일궈낸다.

 


 이 사건으로 김구는 현상금이 걸려 몸을 숨기고 쫓겨 다니는 신세지만 어머니 생일만은 반드시 챙겨드리는 효자다. 생일잔치를 눈치 챈 곽낙원은 돈으로 달라고 하더니, 몰래 총 두 자루를 사와서 내미는 게 아닌가!

 


 이렇듯 성숙해져가는 독립운동에 발맞춰 광복군이 조직되고 사령관에 이청천, 참모장엔 천안출신 이범석이 임명된다. 

 

때맞춰 일본에 강제 징집되었던 조선학도병들도 병영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넘어오는 등,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항일 참전준비가 한창 무르익어갔다. 그런데 아쉽게도 미국의 원자탄 투하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 광복군으로서 당당히 연합군에 합류하여 참전할 기회조차 무산됐다.

 


 노 혁명가는 해방된 조국 땅으로 망명 27년 만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를 부르며 귀국하지만, 상해임시정부 차원이 아닌 개인자격이었다. 나라는 이미 미소에 의해 남북이 갈라진 상태로 북한의 김일성, 남한의 이승만과 이념적 정치적 갈등으로 민족분열의 시련을 맞는다. ‘삼팔선을 베고 죽더라도 분단을 막겠다’던 그는 남북합작을 중재해보지만 실패로 끝나고, 남북한 정부가 따로 들어선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통일 독립 촉성회>를 만들어 총력을 다해보지만, 1949년 6월 26일 일요일 포병 소위 안두희가 쏜 총탄에 맞아 쓰러진다. 

     


 마지막 피날레도 전 출연자가 등장하여 합창한다. 슬픔 속에서 추도하는 춤과 조가(弔歌) 합창인 셈인데, 비장함과 장엄함 그 자체다. 백범 김구선생이 죽음으로써, 온 민족을 하나로 대동단결 뭉치게 하는 국민장을 통해 우리는 거듭난 희망과 통일에의 열망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