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김구자료

우리 김구재단은 선생님의 교육관을 본받아 바른철학을 가진 우수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 1919~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 시절  admin 2015-03-30

    임시정부의 문파수를 지원했던 선생은 왜적의 정탐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의 투항자 유무를 정찰하며,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입하는가를 살피는 경무국장의 일을 보게 되였으며, 한 때 콧수염을 길러 왜의 눈을 속이기도 했다

  • 1937. 특수한 임무를 띠고 떠나가는 동지의 장도를 축하하는 임정 요인들  admin 2015-03-30

     

     

    중일전쟁이 중국 전토로 확대되어 혼란한 와중에서도 적군내 한적사병에 대한 선무공작, 적후방 교란 등의 특무 공작을 진행했었다. 1줄왼쪽: 송병조 · 이시영 · 백범 선생 · 이동녕 · 엄기순 (엄항섭선생1녀) · 조완구. 2줄왼쪽: 엄항섭 · 양소벽 ·김붕준 ·안공근 · 차이석 ·조성환.

  • 1932. 4.26. 백범 선생과 윤봉길 의사 / 윤봉길 의사가 거사하기 몇 일전 서약식을 마치고.  admin 2015-03-30

     

    '4월 29일이다. 새벽에 윤 군과 같이 김해산 집에 가서, 최후로 식탁을 같이 하여 아침밥을 먹으면서 윤 군의 기색을 살펴보았다. 태연자약하다. 농부들이 들에 일하러 나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 자던 입에 밥을 먹는 것을 보아도, 할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윤 군의 밥을 먹는 모양은 담담하고 태연하다.'『백범일지』중에서

     

  • 1940. 9.17.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admin 2015-03-30

     

    백범 선생은 대원수의 자격으로 광복군을 대표한 여군
    (김정숙)의 선서를 지켜보고 있다.

    《 한국광복군 선언문 》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원년(1919년)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립함을 자에 선언한다.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과거 30여년간 일본이 우리 조국을 병합 통치하는 동안 우리 민족의 확고한 독립정신은 불명예 스러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자비한 압박자에 대한 영웅적 항쟁을 계속하여 왔다...우리는 큰 희망을 가지고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가 왔다고 확신한다.'

     

  •  1942.10.25. 대한민국 제34회 의정원은 한국독립당, 조선민주혁명당   admin 2015-03-30

     

    '우리 운동은 3 1운동 이래 많은 분열상태로 오늘 본지에 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짖고 있는 통일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성 으로 임무를 다 하는데서 해결될 것입니다. 내가 오늘 이곳 에서 느끼는 바는, 이번 새로 선거된 신참의원이 다 지사 로서 망라되어 퍽으나 왕성을 이루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 하며, 더욱 나의 임무상으로 보아 기뻐해 마지 않는 바입 니다. 우리가 이 회에서 참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즉 2가지 입니다. 
    ① 대내로 정성단결할 것. 
    ② 대외로는 우리의 통일문제는 우리의 정성합심으로써 
    국제적 지위를 획득해야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34회 의정원 회의〉말씀 중에서

     

  •  1942. 이역만리 중경에서의 선생님.  admin 2015-03-30

     

    '우리는 전민족적으로 단결하여 조국의 독립 주권을 쟁취하여야 될 혁명시기에 있는 것이요, 혁명이란 약한 힘으로써 강한 힘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이니 만큼 난관이 허다하다. 그러나 혁명자란 인류 사회의 정의와 철석 같은 신념을 실현 시키기 위하여, 최후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계속 투쟁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 혁명자는 언제나 낙관적인 태도와 환경 에서 생활할 뿐이다.' <선생님 말씀〉중에서

     

  •  1945. 8. 7. 西安 광복군 제2지대 본부에서 김구 주석은  admin 2015-03-30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전기(電器)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 을 미국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  -『백범일지』중에서 -

    왼쪽 : 엄항섭(임시정부 선전부장) · 백범 선생 · 이청천(광복군 총사령) · 이범석(광복군 제2지대장) · 도너번 소장(OSS 총책임자)

     

  •  1945.11. 3. 27년간의 망명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임시정부 청사  admin 2015-03-30

     

    '...일국의 흥망과 일민족의 성쇠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국운이 단절되는데 있어 치욕적 요소가 허다하였다면, 금일에 조국이 해방되는데 있어 각고하고 장절(壯絶)한 노력이 있었을 것은 삼척의 동자도 알 수 있는 것이다...우리가 우리 조국의 독립을 완성함에는 우리의 일언일구와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다 영향을 주는 것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매사를 임할 때에 먼저 치밀하게 분석하여 명확한 판단을 내리고, 명확한 판단 위에서 용기 있게 처리하여야 한다.' 1945년 9월 3일<임시정부 당면 정책>과 같이 발표한 <국내외 동포에 고한다>중에서.

     

  •  1945.11. 4.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환송하는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이&n  admin 2015-03-30

     

    백범 선생과 장개석 총통이 나란히 앉은 옆에 송미령이 있다. 일본의 패망으로 환국을 앞둔 임정 요인들을 위하여, 내전의 풍운을 앞둔 중국 장개석 총통이 베푼 환송연, 이 자리에서 송미령 여사는 귀국 비용에 보태라고 10만불을 전했다. 그 뒤 중국 공산당에서도 이에 버금하는 성대한 환송연을 여는 등 각계의 환송행사가 잇따랐다.?

  •  1945.11. 5. 상해 홍구 비행장.  admin 2015-03-30

     

     

    27년간의 망명생활 끝에 미 소가 전리품인양 분할점령한 내 조국강산을, 임시정부의 주석이 아닌 개인자격이라는 궁색한 이름을 감수하고 밟아야 하는 백범 선생의 흉중에는... 

  •  1945.12.31. 신탁통치반대전국대회 / 서울운동장.  admin 2015-03-30

     

    '...한국에 대한 4대국 신탁관리는 4국 공동합병 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러면 신탁을 반대하는 자가 의인이며 애국자가 될지언정, 독립 방해자나 반동분자가 될 이유가 어디 있으랴. 이것이야말로 신일진회를 산출할 가능을 가진 위험한 논법이다...또 일부 인사 중에는 본심 으로는 신탁을 반대하면서도 그것이 국제적으로 규정된 기정 사실이므로, 약한 우리로서는 반대 한다 하더라도 도리어 역효과 밖에 내지 못하 리라는 착오인식을 가지고, 오직 복종으로써 그들의 호의를 획득하여서 약속한 5년 후에나 틀림없이 독립을 주기를 애걸하자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러나 다른 약소국들은 자기의 손으로 조인해 놓은 국제조약도 억굴(抑屈)한 것이면, 불평등조약 취소를 세계에 호소하여서 필경 목적을 관철하거든, 우리만이 우리의 사정을 세 계에 호소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선생님 말씀>중에서

     

  •  1946. 5. 귀국후 명동성당에서의 임시정부 환영회에 참석하신   admin 2015-03-30

     

    뒤따르는 이승만 박사 내외의 모습도 보인다.

  • 1948. 3.13. 메논/한위 의장. 백범 선생. 호세택/한위 사무국장.  admin 2015-03-30

     

    '양군이 철퇴하면 진공상태에 빠지고, 북조선 인민군이 쳐들어오고 내란이 일어난다는 것은 모두가 구실이고, 모두가 비과학적 관찰인 것입니다. 남은 북을 의심하고, 북은 남을 의심한다면, 몇 백년을 끌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남을 의심한다면 소련이 의심할 것이고, 북을 의심한다면 미국이 의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외국의 의심을 자기가 맡아서 의심에 의심을 가하는 자는 비민족적, 외국의 주구적 인간임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 밖에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선생님 말씀>중에서

     

  • 1948. 4.19. 38선상에 김구 선생 일행.  admin 2015-03-30

     

    '마음 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칠십유삼인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금일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에 새삼스럽게 재화를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냐, 더구나 외국 군정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냐. 내가 대한민국임시 정부를 주지하는 것도 한독당을 주지하는 것도, 일체가 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는 것 뿐이다...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 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선생님 말씀>중에서 

    왼쪽 : 선우진 · 백범 선생 · 김 신.

     

  • 1948. 4.19. 38선상에 김구 선생 일행.  admin 2015-03-30

     

    단선단정은 통일독립의 장애 - 남북연석회의 축사
    친애하는 의장단과 각 정당, 단체 대표 여러분! 조국분열의 위기를 만구(挽救)하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하여 민주자주의 통일독립을 전취할 대계를 상토(商討)하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독립 운동사의 위대한 발전이며, 이와 같은 성대한 회합에 본인이 참석하게 된 것은(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는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현 단계에 있어서 우리 전 민족의 유일 최대의 과업은 통일 독립의 전취인 것입니다. 그런데 목하(目下)에 있어서 통일독립을 방해하는 최대의 장애는 소위 단선단정입니다.현하에 있어서만 조국을 분열하고 민족을 멸망하게 하는 단선단정을 반대할 뿐 아니라,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있어서도 이것을 철저히 방지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선단정 분쇄를 최대의 임무로 삼고 모인 이 회합은 반드시 전민족의 승리를 우리의 승리로 하여야 할 것이니, 이 회의는 반드시 성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단결적 정신으로써 백사에 개성포공(開誠佈公)한다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것도 확신합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복잡다단한 바 있으나, 우리의 민족적 단결로써 국제간의 친선과 양해와 내지(乃至) 투쟁에 노력한다면 모든 것을 호전시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만일 우리의 노력으로써 국제관계를 호전한다면 세계평화에 대한 공헌이 또한 불소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조국의 통일독립을 완성하며 세계평화에 큰 공헌이 있기 위하여 이 회의의 성공을 절망(切望)하며 아울러 여러분의 건투를 축도합니다.

     

  •  1948. 피치 박사 부부는 윤봉길 의사 의거 후, 김구   admin 2015-03-27

     

     

    '당분간 피신처를 피치 씨 집에 교섭한즉, 피치 씨는 그 부친인 피치 목사가 생존시에 우리에게 크게 동정하든 터이라 그런지 극히 환영함으로, 피치 씨 집으로 이주하여 2층을 전용하고 식사 까지 피치 부인이 극진 정성을 다 하여 윤 의사의 희생의 공덕을 벌써 받기 시작된다.' 

    『백범일지』중에서 

    1열왼쪽 : ○ · 피치 박사 부인 · 백범 선생 · ○ · ○. 2열왼쪽 : 안우생 · 엄항섭 · 유 림 · ○ · 홍명희 · 피치 박사 · 서영해. 

Top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