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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부 기획] 3. 해체위기 딛고 일제의 심장을 폭파하다.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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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위기 딛고 일제의 심장을 폭파하다 


[임정90주년]승리의 역사를 가다 


3. 일제의 오만 응징한 임정 

 


 
기사입력 : 2009-11-26 10:07     [ 상하이=맹창호 기자 ] 

지면 게재일자 : 2009-03-20     면번호 : 13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9월 각지의 임시정부를 통합한데 이어 본격적인 군제정비에 나선다. 지도의 통일성과 공동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무장단체도 임시정부에 적극 참여한다. 서간도 군정부와 자치단체인 한족회는 임시정부에 귀속된다. 북간도 국민회 80여개 지회도 임시정부에 통일기관설치 등 3개 결의사항을 건의한다. 

 



임시정부도 적극 나서 독립전쟁을 지휘할 광복군 사령부와 참리부를 발족시켰다. 독립운동가들은 크게 고무됐고, 금방이라도 광복의 희망에 부풀렀다. 이때까지 임시정부 중심의 전민족적 일치단결에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내부적으로‘외교노선’,‘무력투쟁’,‘실력자강’의 이념과 노선차이가 잠재돼 있었다. 물론 이승만 등 외교노선 우선파가 무장투쟁이나 실력배양을 무시하는 것도, 이동녕 등 무장투쟁을 중시한 인사들이 외교와 실력양성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실력양성을 주장하던 안창호 등이 외교나 무장투쟁을 배척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독립운동 주력에 대한 생각은 분명 달랐다. 

 



전면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독립운동가들은 베이징을 중심으로 반 임시정부세력을 형성했다. 이승만 임시대통령의 미국위임통치 청원사실이 확인되자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독립운동가들은 새로운 차원의 독립운동을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한다. 1920년 9월 베이징에 있던 신채호, 박용만 등을 시작으로, 1921년 5월 만주에서 김동삼과 이탁 등이 임정개혁을 요구했다. 임시정부 내에서도 김창숙, 박은식, 원세훈 등 15인과 노동국총판 안창호도 회의소집에 동의한다. 

 



국민대표회의는 국민의사를 총합하고, 퇴색하는 3.1운동의 정신을 재현하려는 대회합을 이뤘다. 하지만, 파벌과 이념대립속에‘민족’과‘공산’으로 나눠지면서 서로의 입장차를 벌리는 부작용도 보여줬다. 

 



그사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만신창이가 됐으며 일본은 본격적인 대륙침략에 나선다. 임시정부에게는 상황을 타개할 묘책이 필요했다. 

 



▲ 윤봉길의사 의거현장에서 30∼40m 떨어진 곳에는 그를 기념하는 매정(梅亭)과 기념비가 위치한다. 하지만 윤봉길의사의 호는 매헌(梅軒)으로 독립기념관은 오는 4월29일 윤의사의 의거일을 맞아 이를 매헌정으로 바꿀 예정이다. 

 

 

 


 

▲해체위기의 임시정부 

 



1923년 1월 3일 민족주체역량으로 독립운동을 모색하려는 국민대표회의가 상하이에서 개막된다. 이어 2월 2일부터 60여개(최대 120개)그룹 대표 113명이 참석해 회의가 본격화된다.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에 대한 입장에 따라 임정을 새로 구성하자는‘창조파’, 잘못된 점을 고치자는‘개조파’, 임정고수의‘옹호파’로 대립의 각을 세웠다. 

 



창조와 개조의 대립은 지역적 기반과 노선, 이념차이 등에서 나왔다. 창조파는 이승만의 외교노선은 물론 임시정부 자체의 지위와 역할을 부정했다. 이들은 베이징과 노령지역에 기반을 둔 신숙, 문창범, 윤해 등으로 현실적인 군사방침을 수립해 대일항쟁의 무장투쟁 노선을 주장했다. 

 



반면 여운형, 김동삼, 안창호 등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개조파로 상하이와 만주지역을 기반으로 삼았다. 헌법 개정 등 제도와 운영의 개선을 바랐다. 이동휘는 무장투쟁을 주장했지만 개조론의 입장이었다. 

 



6개월 가까이 벌어진 회의는 무려 92차례의 회합을 벌였지만 민족운동의 통일에는 실패한다. 창조와 개조의 첨예한 대립속에 일부 독립단체는 대표를 소환했고 개조파는 대회불참을 선언한다. 창조파는 독자회의를 거쳐 러시아에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지만 흐지부지됐다. 

 



혼미한 정국을 타개하려는 임시정부의 노력이 이어진다. 

 

1925년 3월 13일 임시의정원은 이승만 임시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킨다. 박은식을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한데 이어 4월7일에는 임시헌법을 개정·공포했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위신은 이미 실추될때로 실추돼 독립운동지도자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재정난까지 겹쳐 침체상태에 빠지게 됐다. 내무총장령으로 국민회의 해산을 명령한 김구는 임시정부를 옹호하려 했지만 국무원 구성조차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다. 직할 독립군부대조차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 

 



1926년 말부터는 좌우합작운동인 유일당운동이 일어나 국내에서는 신간회, 만주에서는 삼부(정의, 신민, 참의부)통합, 상하이에서는 한국유일독립당총회가 결성됐다. 하지만, 이 역시 민족과 좌파간의 입장차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는 외부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1927년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1차 국공합작이 무너진데다 1928년 국제공산당 코민테른은‘12월 테제’에서 민족부르주아와 결별을 선언했다. 

 



독립운동이 침체될수록 내분은 늘어갔다. 이승만 탄핵에 이어 대통령제에서 국무령(1925), 국무위원제(1927)로 이어졌지만 수립 당시의 활기를 찾지 못했다. 한꺼번에 밀려온 곤경과 침체에 애국지사들은 착찹함에 곤혹스러워했다. 한편으로 취직해 생활하며 때를 기다렸지만 지루한 나날은 흘러갔다. 

 



반대로 일본은 본격적인 대륙진출에 나서 1931년 만주를 점령하자 이를 공고히 하고 독립운동기지를 없애기 위해 상하이사변을 일으킨다. 임시정부는 거침없는 일본을 저지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결정한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일본의 오만을 응징하며 임시정부는 화려하게 부활한다. 

 


 
▲ 홍구공원 의거직후 윤봉길의사가 체포돼 심문을 받은 일본 상하이 주둔군 헌병대사령부. 홍구공원 북문 인근으로 현재는 주상복합 5층건물로 원형을 찾기 어렵다. 

 

 


 

▲임정의 응징과 부활 

 



일본이 만주침략을 본격화하면서 무장투쟁은 임시정부의 대응전략이 된다. 1931년 9.18사건으로 만주사변을 도발한일본은 안전확보를 의해 중국의 후방이자 독립운동의 거점인 상하이사변을 일으킨다. 

 



이를 주시하던 임시정부는 1920년대 후반부터 무장투쟁을 준비한다. 이동녕 주석은 이일을 재무장 김구에게 맡긴다. 김구가 제안한데다 경무국장을 역임해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국무위원들은 이를 반대했다. 

 



하지만, 이동녕은 이를 적극 지지했고 임시정부예산 수입의 절반을 사용토록 파격적으로 지원했다. 모든 의사결정도 사후 보고토록 위임받았다. 비밀누설을 막기 위해 거사일정도 이동녕, 조소앙, 조완구 등 극소수에만 보고됐다. 

 



임시정부는 80명의 결사대원으로 한인애국단을 결성한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적의 심장부인 도쿄(東京)에 파견돼 일왕 히로히토(裕仁)에게 수류탄을 투척한다. 불행히도 일왕의 차량에 명중하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지만 일본에게는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쾌거였고 한국인의 즉각적인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보여준 의거였다. 중국 신문들은 폐간의 위협 속에‘불행히도 실패했다(不幸不中)’는 제목의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 공동의 적임을 분명히 했다. 

 



김구는 이어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일본 침략의 주구들을 한번에 척살할 계획을 세운다. 

 



이날 오전 10시 일왕의 생일 기념식인 천장제가 열리고 한시간 후 윤봉길 의사는 물통으로 위장한 폭탄을 던진다. 임시로 만들어진 단상에서 거만스럽게 자리를 차지하던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이 폭사한다.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도 왼쪽 다리를 잃었는데 그는 1945년 9월 2일 패전일본의 외무대신으로 미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를 조인했다. 

 



이날의 의거는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중국의 장제스(장개석)총통은 윤의사를‘중국의 백만군대’에 비유하며 의거를 기렸다. 

 



침체된 대한독립운동은 개운한 기지개와 함께 지루한 기다림에 마침표를 찍는다. 

 

김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5월 24일 우상근, 최흥식을 다롄(大連)에 보내 혼조 관동군사령관과 우치다 남만주철도총재를 폭살하려 했지만 아쉽게 실패했다. 김구는 한인애국단 선언을 통해 애국단의 존재를 공식화했다. 

 



일본은 김구에게 외무성, 조선총독부, 상해주둔군사령부 등 3개 기관에서 60만 원의 현상금을 건다. 당시 일본인 철강기술자로 행세하며 거사를 감행한 이봉창 의사의 당시 월급이 80원였던 점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금액이다. 일본이 받은 충격의 정도를 반증하고 있다.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중국 국민당정부에 각종 교섭을 벌인다. 김구가 임시정부의 대표가 됐다는 것은 유교적 질서의 신분제가 실질적으로 사라졌음을 증명한다. 그 스스로가 양반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구는 원로 이동녕과 국무위원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력속에 독립운동사의 중심에 선다.

 

상하이=맹창호 기자 

 



※ 본 시리즈는 김구재단(이사장 김호연)의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