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김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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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꿈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 강산 (환국 성명)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9-01-23

1945년 해방 이후 지도자들의 귀국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승만박사는 19451016일 일본 도쿄를

거쳐 귀국했지만, 백범과 임시정부의 귀국은 그로부터 한달 이상 지연되었다. 국내에서는 11월초

백범이 귀국한다는 오보가 있었고, 115일 백범이 충칭을 떠나자 상하이에잠시머문 후 곧

귀국할 것으로 대서 특필되기도 했다. 그러나 하루가 긴박한 해방정국에서 백범은 무려 18일간

상하이에 머물게 되었다. 그 핵심 이유는 임시정부에 대한 인정 문제였다. 즉 주한미군과 미군정은

임정을 정부로 인정하지않고, 그 요인들을 미군정의 자문기구로 편입하고자 했다.1119일 결국 백범은

?임정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며, 귀국이후에도 정부로서 행세하지 않으며, 미군정에 협조한다

서약서를 하지 John R. Hodge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제출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난 이 후 1123일 오후 440, 백범과 임정요인 제115명이 김포공항에

도착했으며, 백범은 죽첨장 竹添莊(이후 경교장 京橋莊)으로 이동했다. 백범과 임정 제1진의 귀국은

사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귀국 이후 오후 6시 방송으로 간단히 보도되었을 따름이다.

백범은 당일 저녁 엄항섭 嚴恒燮을 통해 환국 성명을 발표했다. 귀국 직후 백범의 성명이나 기자회견

에는 꿈 같은 환희도 표현되어 있지만, 임정을 인정하지않는 미군정의 정책 때문에 대단히 신중한 입장이

표명되어 있다. _『자유신문』1945.11.24;『건국훈화』;『백범김구전집』8


27년간 꿈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 강산을 다시 밟을 때 나의 흥분되는 정서는 형용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 조국의 독립을 전취하기 위하여 희생되신 유명 무명의 무수한 선열과,

아울러 우리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피를 흘린 허다한 동맹국 용사에게 조의를 표합니다. 다음으로는 충성을

다하여 삼천만 부모 형제 자매와 우리나라에 주둔해 있는 미소 동맹군에게 위로의 뜻을 보냅니다.


나와 나의 동료들은 과거 2, 30 년간 중국의 원조하에서 생명을 부지하고 우리의 공작을 전개해 왔습니다.

더욱이 이번 귀국에는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장국 이하 각계층의 덕택을 입었습니다. 또한 한국에 있는 미군

당국의 융숭한 성의를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나의 동료는 중.미 양군에 대하여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 조국의 북부를 해방해 준 소련에 대하여도 동일한 경의를 표합니다.


이번 전쟁은 민주를 옹호하기 위하여 파시스트를 타도하는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의 유일한 원인은

동맹이라는 약속을 통하여 상호단결 협조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을 영도하여 큰 전공을 세운

미국도 승리의 공로를 독점하지 않고 동맹국 전체에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겸허한 미덕을 찬양

하거니와, 온 힘을 다해서 같이 싸운 동맹국에 대해서도 일치하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일처리는 다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나와 나의 동료는 모두 일개 시민의 자격으로 귀국했습니다. 동포 여러분의 부탁을 받아 가지고 노력했으나

결국 이와 같이 대면하게 되니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은 나에게 벌을 주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열렬하게 환영해 주시니 감격의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나와 나의 동료는 오직 완전히 통일된 독립 자주의 민주국가를 완성하기 위하여 여생을 바칠 결심으로 귀국

했습니다. 여러분은 조금이라도 거리낌 없이 심부름을 시켜주시기 바랍니다.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유익한 일이라면 불 속이나 물 속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도움으로 여러분과 기쁘게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곧 소련의 도움으로 북쪽의 동포도

기쁘게 대면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여러분도 함께 이날을 기다리십시다. 그리고 완전히 독립 자주할 통일된

새로운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공동 분투합시다.